이지현 바이오헬스 기자 bluesky@hankyung.com
“규제 부분은 이미 아시잖아요. 얘기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취재수첩] 피로감 키우는 말뿐인 규제 개혁

요즘 유전체, 빅데이터, 헬스케어 분야 연구를 하는 의료진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다. 미래의학의 밑그림을 그린다는 열정으로 연구에 몰두해오던 이들에게서 자조감마저 느껴진다.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의료법, 의료기기법, 개인정보보호법, 생명윤리법 등의 규제 조항을 열거하며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던 이들이지만 요즘 들어선 하나둘 입을 닫고 있다.

그동안 이들이 지적하던 규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익명의 개인 의료 정보 활용이 불법인지 합법인지 가이드라인만이라도 만들어 달라”는 업계 목소리에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규제에 막혀 의료 빅데이터는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지난달 국내에서 처음 허가받은 인공지능(AI) 의료기기는 신의료기술평가라는 이중 규제에 묶여 출시 일정조차 못 잡고 있다. 이렇다 보니 규제 개혁이라는 말 자체에 피로감을 느낀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지난 27일 한경바이오헬스포럼 정책토론회에 참석한 토론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시민단체 반대로 해결하기 어렵겠지만…”, “정부가 노력하고 있지만…”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규제가 기술을 가로막는 한국과 달리 미국, 유럽 등에선 규제가 기술을 육성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2014년 환자 맞춤형 의약품 등에 대해서는 허가 속도를 높이고 임상 환자 숫자를 줄이는 정책을 내놨다. 이후 이 분야 의약품 후보물질은 5개에서 132개로 크게 늘었다. FDA는 융합의료 시대를 대비해 기술검증 시스템까지 바꿨다. 디지털헬스케어 기기에 사전인증 제도를 도입해 상용화까지 걸리는 시간을 대폭 줄였다. 유전자 검사, AI로도 제도를 확대할 계획이다.

‘혁신성장을 위한 규제개혁’을 내걸고 있는 정부에 기대를 걸었던 상당수 연구자들과 산업계는 실망을 넘어 체념 수준이다. 남은 것은 포기다. 국내 헬스케어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과 유전체·AI 분야 인재들이 해외로 떠나고 있다. 이들의 발걸음을 한국으로 다시 돌리기 위해 정부가 움직여야 할 순간은 내일도 모레도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