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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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을 흔히 '신뢰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업계에는 뿌리깊은 상호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블록체인은 거래원장에 기록된 정보의 위·변조를 막는 기술일 뿐, 블록체인을 만드는 기업까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한 가상화폐(암호화폐) 채굴기 업체에서 자체 암호화폐(코인)를 발행했다. 해당 업체는 자체 코인을 자사 암호화폐 거래소에 등록하고 자사 쇼핑몰 결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암호화폐 공개(ICO)를 거치지 않고 상장했으며 실물경제에 사용되는 유일한 코인으로 홍보하고 있다.

이더리움 등 기존 블록체인에 의존하는 디앱(dApp)을 개발하거나 암호화폐(토큰)를 선보이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자체 블록체인 네트워크(메인넷)를 구성해 코인을 발행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따라서 채굴기 업체에서 코인을 발행했다는 주장을 쉽게 믿기 어려웠지만, 선입견일 수 있다는 생각에 회사 관계자를 컨퍼런스 현장에서 만나 설명을 듣기로 했다.

질의에 나선 회사 임원은 암호화폐 처리속도(TPS)를 묻자 “평균 2000mh/s”라는 답했다. mh/s 단위는 암호화폐 채굴기의 성능을 가늠할 수 있는 초당 해시파워를 나타내는 수치다. 흡사 자동차 최고 속도가 몇 km/h인지 물었더니 최대 적재량은 몇 톤이라고 답한 모양새다. 질문을 잘못 이해한 것 아닐까 싶어 수 차례 확인했지만 답변은 달라지지 않았다.

암호화폐 소스코드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해당 임원은 “알아서 잘 만들었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 거래소 사이트에 가입하면 5만원 어치 코인을 준다”며 가입을 요구해왔고, 거기서 대화는 끝났다.

아주 드문 사례가 아니다. 블록체인이나 암호화폐 관련 행사에서 흔히 벌어진다. 또 다른 행사장에서는 “돈을 쓰면 쓴 만큼 번다”며 결제금액을 투자해 수익을 내겠다는 업체도 있었다. 소비자가 물건을 구매하면 결제 대금은 판매자에게 전달돼야 하는 게 상식. 하지만 이 업체는 자사 암호화폐를 사용할 경우 결제 대금을 판매자에게 곧바로 주지 않고 알고리즘 투자 방식에 따라 임의로 투자해 수익을 낸 뒤 지불하겠다는 주장을 폈다.

상대적으로 블록체인에 익숙한 청년층에서는 잠깐의 전송 지연시간 동안 쓴 돈 만큼의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별로 없다. 결제 대금 전송 지연도 문제고 투자가 무조건 수익을 낸다는 보장도 없다. 손실이 나면 판매자에게 지불할 대금은 누가 부담할 것인가.

하지만 해당 업체 부스는 행사장을 찾은 중장년층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검증된 투자 알고리즘이라 손실은 절대 나지 않는다”는 업체 주장을 더 듣기 위한 경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채굴기 업체의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종이로 된 가입신청서를 작성했다.

이러한 업체가 늘어나며 블록체인 업계는 상호 불신의 시대를 맞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대놓고 의심 드는 업체도 많고, 그런 업체에 가려 사기(스캠)를 분간하기도 어려워진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물론 시장에서는 자정을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블록체인협회는 거래소 자율규제를 도입했고 블록체인산업진흥협회는 블록체인 기본법 발의를 추진했다. 하지만 그 정도 노력으로는 퍼지는 불신을 막기 힘들 것 같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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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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