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선 '연구 천재'… 한국 오면 '시들'
미국 대학원에서 박사후연구원을 거치며 사이언스 로보틱스 등 유명 국제학술지에 로봇 분야 논문을 발표했던 K교수. 그는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한국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의 연구 분야는 지금도 해외에서 경쟁자가 거의 없는 로봇산업의 첨단 신기술이다.

그러나 K교수는 귀국 후 기존 로봇기술을 검증하는 실용화 연구에 더 신경쓰고 있다. 정년을 보장받으려면 새 분야를 개척하기보다는 논문을 빨리, 또 많이 내야 하는 한국적인 연구 풍토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뇌 단백질을 연구하던 30대 K연구원은 최근 국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갑작스러운 이직의 배경은 한 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연구 분야에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으나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가 아니라 위에서 떨어지는 연구과제를 맡아야 했다.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해주기보다 위계질서에 따라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권위적인 연구실 문화가 작용했다.
해외선 '연구 천재'… 한국 오면 '시들'
정부는 해마다 20조원에 이르는 연구개발(R&D)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의 R&D 투자 규모는 세계 1위 수준이지만 1인당 논문 인용도와 같은 연구 품질을 가늠하는 성과는 최하위 수준에서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연구자들의 자율성과 사기가 꺾이면서 과학의 지형을 바꾸는 혁신적인 연구가 시들해진 영향이 크다. 미국 학술정보 서비스기업인 클래리베이트애널리틱스(옛 톰슨로이터)의 분석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지난해 각 연구 분야를 선도하는 논문 인용 수 1% 연구자를 한국은 전년 28명과 비슷한 30명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중국은 같은 기간 41% 늘어난 249명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세계 연구계를 주도할 수 있는 연구를 하려면 창의성과 독창성을 가로막는 풍토와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11일 서울 연세대에서 열린 노벨석학 초청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랜디 셰크먼 미국 UC버클리 교수(2013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는 “한국에서 선도적인 연구가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도전적인 문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기존 연구를 지속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며 연구에 집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연구자의 창의성을 보장하기 위해 연구자 스스로 주제를 정해 과제를 지원하는 기초연구비를 2022년까지 두 배 수준인 2조5000억원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정작 창의성을 판단할 기준을 마련할 풍토가 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교수 임용과 연구 과제 신청 과정에서도 창의성을 가로막는 암초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김두철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도 “한국은 학자로서 첫 단계인 대학원을 다니면서부터 권위적인 환경에 노출된다”며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자로서 길을 가기 시작해도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연구자들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키우기 위해서는 귄위적인 연구실에서 벗어나 수평적이고 토론 중심적인 연구 풍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초강력 레이저과학연구단 소속 연구원이 4페타와트급 레이저 장치를 이용해 실험하고 있다. IBS 제공
연구자들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키우기 위해서는 귄위적인 연구실에서 벗어나 수평적이고 토론 중심적인 연구 풍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초강력 레이저과학연구단 소속 연구원이 4페타와트급 레이저 장치를 이용해 실험하고 있다. IBS 제공
R&D 투자는 세계 수준… 창의성은 떨어져

해외선 '연구 천재'… 한국 오면 '시들'
독창성보다 논문 수를 강조하는 정량적인 평가 문화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대다수 대학이 교수 임용과정에서 비리를 없애겠다며 논문 수만 따져볼 뿐 정성적인 부분에 대한 평가가 미흡하다는 것이다.

연구자가 제안한 연구의 독창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이 충분한 논의와 평가를 거쳐야 하지만 이해 관계자를 무조건 배제하는 평가 방식이 적용되다 보니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닌 연구자가 평가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연구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연구실 환경이 창의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출연연은 상황이 그나마 낫지만 대학들의 경우 과학자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술적 지원을 하는 테크니션(기술원)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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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중심 중국, 혁신 연구 중심지로 성장

한국의 과학이 덩치만 커진 채 소화불량에 걸린 사이 각국은 기존 과학의 틀을 뒤흔들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약진이 눈에 띈다.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는 “중국이 학술 논문의 성과와 영향력 면에서 급부상하며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연구재단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재 중심 정책이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향후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있는 인재 100명을 포함해 10년간 자연과학과 공학분야에서 고급인재 1만 명을 기르는 만인계획을 통해 해외와 자국 내 인재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재 중심 투자가 서서히 먹히고 있다는 평가다.

올 들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소개된 주요 논문 가운데 상당수는 중국 내 연구자들과 해외에서 유학 중인 연구자들이 저자로 참여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노벨상을 받을 만큼 혁신적인 연구가 많이 나오려면 한국 고급 연구자 수가 더 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한국은 이공계연구원 수가 세계 4위지만 인구 1만 명당 고급 인재 수에서 세계 22위에 머물고 있다.

김태정 한양대 교수는 “한국은 여전히 ‘기초연구를 하면 배고프다’는 근거 없는 기피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며 “기초연구에 뛰어드는 연구자들이 줄어들면 그만큼 연구 다양성이 떨어져 창의적인 연구 주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