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바이오기업 A사는 최근 긴급 대책 회의를 열었다. 금융당국이 연구개발(R&D) 비용을 자산으로 분류하던 제약·바이오기업의 관행에 제동을 걸면서 지난해 적자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작년 매출이 증가했음에도 R&D 투자비를 한꺼번에 비용으로 처리해 실적이 악화됐다. A사 관계자는 “예상치 못한 회계 규정 변화 때문에 한순간에 부실기업이 됐다”며 “적자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바이오업종이 아니라 수익사업을 인수합병(M&A)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비, 비용처리 땐 무더기 적자"… 바이오기업 '증자·M&A' 총력전
올초 셀트리온에서 시작된 R&D 비용 논란은 최근 ‘차바이오텍 사태’로 본격화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기업 펀드멘털과는 무관하게 회계 기준 변경 때문에 실적이 급변해 어려움을 겪는 ‘제2, 제3의 차바이오텍’이 나올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일부 기업은 적자를 메우기 위해 M&A, 사업 분할, 유상증자, 구조조정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까다로운 기술특례상장 심사로 바이오벤처의 코스닥행이 무산되고 있는 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으로 국내 시장 개방이 임박하는 등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에 악재가 잇따르고 있다.

악순환 고리 이어지나

그동안 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이 R&D 비용을 자산으로 처리해온 관행은 ‘엄밀히’ 말하면 불법은 아니다. 국내 회계 기준상 연구개발비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비용으로 분류할 수도 있고 자산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경상개발비로 인식하면 판매관리비에 포함해 비용으로 분류하고 연구개발 성과가 미래 특허나 기술수출 등 자산이 될 가능성이 높으면 무형자산 항목 중 개발비로 처리한다. 이 경우 연구개발비는 매년 일정 비율로 감가상각해야 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그동안 국내 상장 제약·바이오기업 152곳 중 83곳(55%)은 신약 개발에 들어가는 연구개발비를 대부분 회사 자산으로 처리해왔다. 실패하더라도 R&D 경험이 다른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문제는 R&D 비용을 지출이 아니라 자산으로 분류하게 되면 회사의 영업이익이 증가해 재무 구조가 개선되는 효과로 나타나는 데 있다. 제약·바이오기업들이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회계 관행을 악용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금감원이 테마 감리를 벌인 배경이다.

업계는 이번 회계 감리로 재무 구조가 투명해져 바이오기업의 옥석을 가리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점은 환영하고 있다. 그러나 엄격한 회계 기준이 기업의 연구개발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회계 기준 변경이 ‘재무구조 악화→투자 유치 저해→R&D 투자 축소→회사 경쟁력 저하’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금감원의 테마 감리 후폭풍이 일면서 제넥신, 바이로메드, 파미셀 등은 연구개발비를 비용 처리했고 수익성이 악화됐다. 3년 연속 영업적자가 발생한 솔고바이오, 에이치엘비 등은 올해도 흑자 전환에 총력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다. 차바이오텍처럼 4년 연속 영업적자를 기록하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돼 상장 폐지 대상에 오른다.

R&D 인정하는 약가구조가 우선

제약·바이오업계는 금융당국에 연구개발비의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개발비를 무형자산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실현 가능성, 미래 경제적 효익을 창출하는 방법, 개발 관련 기술 및 재정적 자원 입수 가능성, 지출을 신뢰성 있게 측정할 수 있는 기업의 능력 등 여섯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상용화 가능성을 입증하면 연구개발비를 무형자산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준이 불분명한 데다 연구 분야별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유전자 치료제, 줄기세포, 유전자가위 등 신약 개발 유형과 방식에 차이가 있어 상업성을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다. 셀트리온은 “고위험 고수익인 신약과 달리 바이오시밀러는 중위험 중수익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어 R&D 비용의 자산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희귀병 치료제는 임상 2상 이후 조건부 허가를 거쳐 시판할 수 있는데 R&D 투자비를 모두 비용으로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R&D 비용의 자산화를 막는 회계 구조는 자금력을 갖춘 대기업의 독주체제를 심화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수조원의 개발비를 감당할 수 있는 글로벌 제약사들과 국내 제약·바이오회사에 같은 규정을 적용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미국처럼 R&D 비용을 인정해주고 높은 약가를 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