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올랐던 '국내 1호 화학박사' 이태규
“이 나라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학생들의 탐구욕, 세계 일류학자가 들려주는 어려운 강연을 끝까지 듣고 이해하려는 그 강인한 탐구욕에 머리가 수그러졌습니다. 한국의 내일은 밝습니다.”

미국 유타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태규 박사(1902~1992·사진)는 1964년 9월 잠시 귀국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의 말에 고무된 박 전 대통령은 그를 포함해 해외에 나가 있는 과학자들의 귀국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9년 뒤 그는 유타대 교수직을 버리고 영구 귀국했다.

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올랐던 '국내 1호 화학박사' 이태규
국내 1호 화학박사이자 대한화학회 전신인 조선화학회 초대 회장인 그는 최초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과학자다. 그는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일본에서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고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스승이자 당대 일본 최고 화학자이던 호리바 신기치 교수는 일찍부터 그런 제자의 능력을 높이 사 “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느냐”며 조선인이던 그를 일본 대학교수로 강력히 천거했다.

교수로 정식 임명을 받았지만, 그의 호기심은 지치지 않았다. 당대 최고 석학들이 모여 있는 미국 프린스턴대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이론 화학을 연구하던 헨리 아이링 교수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됐다. 두 사람이 당시 함께 연구한 쌍극자 능률 계산에 대한 논문은 화학분야에 양자역학을 도입한 첫 사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올랐던 '국내 1호 화학박사' 이태규
해방 후 잠시 귀국했던 그는 1948년 다시 미국 유타대로 건너가 아이링 교수와 연구를 계속했다. 1955년 두 사람 성을 따서 발표된 ‘리-아이링 이론’은 점성(粘性) 물체의 흐름 성질을 연구하는 분자점성학의 기초가 됐다. 그는 이 이론으로 일약 세계적 과학자 반열에 올랐고 1965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 추천위원이 됐다. 1969년에는 한국 최초로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 그가 이론을 한창 연구하던 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가족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그는 연구에 더 전념했다. 훗날 그는 가족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을 잊기 위해 몰두한 결과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화학의 초석을 놨다. 1945년 해방 직후 일본에서 잠시 귀국한 그는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대 이공학부장과 서울대 문리대 학장으로서 학문 연구와 교육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에는 대한화학회(옛 조선화학회)를 창립했다.

그는 1992년 10월26일 대전 KAIST 연구실에서 퇴근한 후 별세했다. 정부는 화학 발전의 초석을 닦은 공적을 인정해 그를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유품으로 남긴 액자에는 그의 평생의 신념인 ‘예리한 관찰과 끊임없는 노력’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