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막 가시기 시작한 19일 오전 6시께.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최고운영책임자 · COO)이 김포공항 국제선 입국장에 들어섰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의 초청으로 지난 17일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열린 스티브 잡스 추도식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16일 밤 미국으로 떠난 뒤 이틀 밤을 비행기에서 보내는 1박4일의 강행군을 한 탓인지 피곤해 보였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추도식 다음날 쿡 CEO 사무실을 찾아 두세 시간 만났습니다. 잡스와 비즈니스를 하며 겪은 지난 10년간 어려웠던 이야기와 위기 극복,그리고 양사 간 좋은 관계를 더 발전시켜 나가야겠다는 그런 얘기들을 나눴습니다. "

이 사장은 앞서 출국 때 그런 것처럼 이날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막힘이 없었다. 애플에 대한 추가 소송 여부를 묻자 "법무팀이 경영진과 협의해서 필요하면 할 것이고,생각을 해봐야 한다"고도 했다.

◆존재감 커진 이재용 사장

이 사장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하지 않을 만큼 부쩍 자신감이 붙은 모습이고 보폭도 확연히 넓어지고 있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곧잘 "회장님께 물어보라"라며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뒤를 지킬 뿐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그였다.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 전쟁이 가열되고,공교롭게도 그 와중에 사망한 잡스 추도식에 초청받으면서 'JY' 고유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사장은 지난달 29일 '애플에 강력히 대응할 것이냐'는 한국경제신문 기자의 질문에 "10월4일이나 5일에 보세요.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삼성의 본격 반격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해석이 나왔고,삼성전자는 5일 밤 애플의 신형 아이폰4S에 대해 프랑스와 이탈리아 법원에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 사장은 16일엔 "삼성과 애플은 동반자가 돼야 하고 시장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며 일방적 양보는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추도식 참석을 계기로 회사 내는 물론 국내외 언론에서의 존재감도 커지는 분위기다. 외신들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래리 페이지 구글 CEO,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등과 함께 이 사장이 40여명에 불과한 추도식 참석자에 이름을 올린 데 대해 주목하고 있다.

◆경영 보폭 넓어지나

이 사장은 잡스 추도식에 수행원 없이 홀로 참석했고 다음날 쿡 CEO와도 두세 시간가량 담판했다. 삼성 관계자는 "초청을 쿡 CEO로부터 개인적으로 받은 것으로 혼자 움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 사장은 쿡 CEO와 만나 "부품 공급은 내년까지는 그대로 가고 2013~2014년은 어떻게 더 좋은 부품을 공급할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삼성 측은 이와 관련,"내년까지의 부품 물량은 앞서 체결된 계약에 따라 공급하고,그 이후에도 최소 2014년까지 부품을 공급하는 것을 전제로 더 좋은 부품을 공급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애플이 부품 조달처를 대만 TSMC 등으로 돌릴 수 있다는 일부 우려를 불식시킨 것으로,이 사장은 특허분쟁 와중에도 최대 고객인 애플과의 관계를 굳건히 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외 주요 고객사를 관리하는 삼성전자의 COO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수완을 보임으로써 이 사장의 경영 보폭이 한층 넓어지고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삼성 관계자는 "애플과의 특허 소송과 잡스 추도식 참석 등을 계기로 그룹 안팎에서 이 사장의 존재감이 커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수언 기자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