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분야 공공기관에 근무하던 해커 출신 L씨는 최근 호주의 한 인터넷업체로부터 '연봉 3억원,시민권 보장'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이 업체는 L씨가 가족과 함께 머물 집까지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3년 전 세계 해킹 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던 해커 C모씨도 올초 홍콩 정보기술(IT)업체가 제안한 연봉 2억원의 조건에 비행기를 탔다. 그에겐 자기만의 사무실과 함께 팀을 꾸릴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다.

한국의 실력파 해커들이 외국으로 잇달아 떠나가고 있다. 외국 업체가 제시하는 연봉에 턱없이 모자라는 국내 기업들의 채용 조건과 해커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다. 정부가 최근 사이버 보안관(화이트 해커) 3000명을 양성하겠다며 의욕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쓸 만한 해커 인재들은 이미 한국에 없거나 마음이 떠나 있다고 보안업계는 우려하고 있다.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1000여명의 해커 가운데 100명 이상은 국내외 해킹대회에서 상위권에 입상한 실력파로 알려져 있다. 보안업체 쉬프트웍스의 홍민표 대표는 "세계 무대에 알려진 해커들치고 해외 기업이나 외국 기관의 러브콜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전했다.

홍 대표는 "미국 대기업들은 세계 해킹 대회에서 수상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해커에게 보통 20만~40만달러의 연봉을 주고 스카우트한다"며 "반면 국내 기업들이 제시하는 연봉은 기껏해야 3000만~4000만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해커에 대한 대우가 이렇다 보니 서울시가 지난달 26일 "해커 출신 '정보 보안 분석 요원'(계약직)을 연봉 7000만원 상당의 조건으로 뽑겠다"며 채용 공고를 내건 것이 보안업계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해커들의 '한국 엑소더스(탈출)' 현상은 사이버 보안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시대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희정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원장은 "사이버 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질 것이 분명한데도 정작 우리는 전투요원을 잡을 수가 없다"며 "해커들에 대한 국내외 처우 격차 해소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