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16일 포털 사이트 업체들이 비방글을 삭제하지 않고 내버려뒀다며 배상책임을 물은 것은 포털이 적극적으로 인터넷상의 명예훼손 행위를 막을 의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법원은 또한 포털이 비록 직접적인 취재 기능은 없지만 막강한 편집권을 행사하는 만큼 신문ㆍ방송과 같은 언론매체로 봐야 한다는 첫 판례를 남겼다.

◇ "신고 없이도 비방글 지울 의무" = 법원은 네티즌들이 회원으로 가입할 때 동의하는 약관 내용에 기초해볼 때 포털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네티즌들의 서비스 이용을 제한하거나 게시물을 삭제할 의무가 있다고 봤다.

또한 포털은 통상 피해자들의 신고가 있어야 비로소 비방 등 문제 소지가 있는 글을 삭제해왔는데 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이보다 더 나아가 불법성이 명확하다고 인식될 때는 포털이 적극적으로 삭제 조치를 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번 사건의 경우 김 씨와 숨진 여자친구에 대한 글들이 인터넷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며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오르기도 했고 이런 현상이 언론을 통해 기사화된 점에 비춰봤을 때 명예훼손의 위험이 명백한 경우라고 판단했다.

주심인 김영란 대법관 등 이번 판결에 참여한 12명의 대법관 중 9명은 이 같은 다수 의견을 취했지만 박시환 대법관 등은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며 별개 의견을 냈다.

박 대법관 등은 `불법성이 명확하다고 인식될 때'라는 게 어떤 경우인지를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피해자가 삭제를 요구한 뒤 포털이 문제 소지가 있는 글을 지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봤다.

형사법적으로 보더라도 명예훼손 행위가 친고죄 또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하는데 피해자가 어떤 조치를 원하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포탈이 삭제 등 조처를 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 "포털은 언론, 상응하는 책임져야" =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포털이 사실상 언론매체로서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례가 처음 나온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포털들은 명예훼손 사태를 확산시킨 언론사들의 기사는 개별 언론사가 책임을 져야 하며 자신들은 제공받은 기사를 인터넷 공간에 띄운 것일 뿐이어서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취재 인력이 없다고 해서 언론매체가 아니라는 포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포털은 언론사들로부터 공급받은 기사들을 정치ㆍ사회ㆍ연예 등 분야별로 분류하고 나름의 취사선택을 통해 중요도에 따라 배치하는 편집권과 강한 전파력을 가진 언론이라는 것이다.

또한 신문ㆍ방송도 자기 회사 기자들의 취재 내용만으로 지면을 채우거나 방송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뉴스 등 통신사 등을 통해 공급받는 기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포털이 취재인력이 없이 편집 기능만 수행하고 있더라도 언론매체로 보기에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김 씨의 사건을 네티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공간에 올려놓은 포털의 편집 행위는 김 씨 피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피해를 확대시킨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 법원의 견해다.

(서울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setuz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