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단지 연구원들 마음의 절반은 이미 대덕을 떠나 있습니다. 누구나 최소한 한두개의 원서는 책상 서랍 안에 두고 있을 것입니다." 대덕의 한 연구소에 근무중인 L씨. 10여년 경력에 일선 연구원으로서 최고 자리인 책임 연구원 자리까지 올랐지만 그의 고민은 '떠날 것인가, 더 남아 있을 것인가'이다. 2~3년 전 구조조정 속에서 많은 동료 연구원들이 자의반 타의반 곁을 떠나갔을 때만 해도 그는 연구원을 천직으로 알고 버텨 왔다. 그러나 최근 모 지방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의뢰받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이번에는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동안 묵묵히 연구에만 매달려 왔지만 요즘 들어 삶에 대해 자꾸만 회의가 듭니다." L씨는 "2년 전 연구소에서 받았던 월급의 3분의 1 수준을 제의받고 이름도 낯선 지방대 교수로 옮긴 선배 연구원에 비하면 이번에 내가 제의받은 조건은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꿈과 희망은 사라지고 허무와 냉소주의에 빠져 있는 연구원들. 국내 최고 과학기술연구단지인 대덕의 현주소다. 대덕연구단지는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 연구비가 줄어들고 상당수 연구인력이 현장을 떠나면서 인력구조의 왜곡현상이 발생, 신음하고 있다. 어느 연구소를 둘러봐도 중간 간부급 연구원 수가 충분한 곳을 찾기가 어렵다. 연구단지 구조조정 이후 유능한 책임급 연구원들 상당수가 벤처기업이나 대학 등으로 나가고 없기 때문이다. 한 연구원은 "최근 젊은 인력이 신규로 대거 채용되고 있지만 연구과제를 지휘할 핵심멤버들이 빠져 연구 프로젝트를 따더라도 제대로 진행이 안돼 애먹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대덕을 초창기부터 지켜온 고참 연구원들의 고민은 또 다른데 있다. 25년 경력의 모 연구소 연구부장 H씨는 "나이 40만 넘으면 퇴물 신세가 되는 풍토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가 연구원들의 정년을 낮추고 연구소들도 연구비를 따내기 위해 간부급 연구원들을 밖으로 내모는 데서 비롯된 문제라는게 그의 설명이다. H씨는 "박사학위를 마치면 보통 32∼34세부터 연구를 시작하지만 지금같으면 10년도 채 안돼 연구현장에서 떠나야 된다"며 "이런 상황에서 대덕단지의 경쟁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기업에 뒤떨어지고 있는 것도 연구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요인의 하나다. 한 연구원은 "산업의 근간이 되는 기초.기반기술을 개발한다는 정부 출연 연구소 연구원으로서의 사명감이 유명무실해지고 있다"며 "이제는 각종 프로젝트 수주 확률을 높이기 위해 기업에까지 공동연구기관으로 참여하자고 제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다 보니 단기간에 개발해 만들어 팔수 있는 기술들이 프로젝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낮은 보수도 문제다. 80년대초 대기업 연구소에서 정부 출연 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한 연구부장은 "당시만 하더라도 정부 출연 연구소 월급이 민간 기업보다 훨씬 많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역전됐다"고 밝혔다. 연구원들의 사기가 이처럼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대덕연구단지도 활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하나같은 지적이다. 특별취재팀 strong-kor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