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원(KAIST) 재료공학과 박사과정의 김모씨(30)는 최근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내년 봄 박사학위 취득을 앞두고 대기업 연구소 세 곳에 지원했다가 모두 탈락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연구소들이 국내박사를 기피하고 있는 데다 모집 인원도 극소수여서 경쟁이 무척 치열했다고 들었다"면서 "차라리 석사과정만 마치고 일찌감치 취업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며 씁쓸해 했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할 무렵이던 6∼7년 전만 해도 박사학위를 받으면 자신이 원하는 연구소에 거의 1백% 취업을 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털어놓았다. 김 씨는 "연말까지 모집공고가 나는 대로 여러 연구소에 지원해볼 생각이지만 막상 현실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나니 자신감이 많이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KAIST 석사 2년차인 이 모씨(25)는 요즘 주말마다 서울행 버스를 탄다. 고시학원에서 변리사 시험에 대비한 주말반 강의를 듣고 스터디그룹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씨는 "힘들게 학위를 받고도 연구소에서 박봉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선배들을 보고 불안감을 느껴 올 초부터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대학원생 중에 전공 공부와 변리사 준비를 동시에 하는 학생들이 종종 눈에 띈다"고 밝혔다. 자연과학.공학 분야에서 국내 최고를 자부해온 KAIST 학생들이 방황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불투명한 진로' 때문이다. 박사 학위를 받고도 자리를 구하지 못해 '떠도는' 선배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왜 힘들게 과학기술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회의에 빠지기 일쑤다. 밤 10시 이후 KAIST 도서관내 흡연실. 건설.환경공학과 박사과정의 정모씨(30)가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올해 건설회사에 취직한 선배의 연봉이 2천만원대라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이런 상황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연구에 전념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고 되물었다. 올초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최모씨(27)는 전산학과 출신이다. 그가 자신의 전공을 버리고 경영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 역시 '불안한 미래' 때문이다. 최 씨는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소나 기업으로 진출해도 급여나 보상이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학생들 사이에 퍼져 있다"고 전했다. 최씨는 전산 전문가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목표를 바꾸었다. 박사과정 4년째인 정모씨(28)는 같은 연구실 후배와 논쟁을 벌였던 얘기를 들려줬다. 그가 "공학도로서 전공 공부와 연구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 후배는 "공학자 출신도 다양한 사회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는 것이다. 정씨는 "몇년 전만 해도 KAIST 학생들은 과학기술 연구에 몰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같은 논쟁이 벌어질 수 없었다"며 달라진 학교 분위기를 설명했다. 그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여전히 전공에 매진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과학기술 연구가 이른바 3D 업종이라는 자조섞인 말들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연구중심 교육기관임을 자부해온 KAIST. 요즘들어 그러한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한국 최고의 과학두뇌들이 'KAIST' 이념에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strong-kor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