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공대 출신 A씨. 그는 올 초 들어간 대기업 그룹에서 6개월 동안 신입사원 연수를 받았다. 지난달 현업에 배치됐지만 앞으로도 6개월 가량 추가로 집중 교육을 받아야 한다. 사회에 진출하기가 무섭게 대학에서 배운 이론이 현장에서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18세기 강의실에서, 19세기 자료를 가지고, 20세기 교수가, 21세기를 살아갈 학생을 가르친다.' 재학중 우스갯 소리로만 들렸던 이 말이 터무니없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바로 커리큘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 공대 기계항공공학부의 경우 설계과목을 찾아 보기가 힘들다. 3학년 과정에 기계설계과목이 필수과목으로 유일하게 개설돼 있다. 나머지는 선택과목이다. 16학점을 반드시 따고 종합설계(Capstone-Design)까지 배워야 하는 미국의 공대와는 판이하다. "자동차분야 등에서 요구하는 설계인력을 키우는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라는게 학과측 설명이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을 실제로 설계 및 제작에 적용하는 설계프로젝트도 전공필수가 아니다. '공대가 설계도면 조차 이해 못하는 엔지니어를 양산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재료공학부에서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고분자공학과 금속공학과 무기재료공학과 등 3개과가 합쳐지면서 부작용이 일어났다. 3개과에서 가르쳐온 유기화학 물리화학 등 기초분야 과목들로 강의가 대부분 이뤄지고 있다. 미국의 MIT와는 크게 다르다. MIT의 경우도 학부 때는 기초과정을 가르친다. 그러나 3학년 2학기부터는 고분자 금속 무기재료 가운데 한 분야를 선택하게 한다. 졸업할 때까지 한분야만 집중적으로 수강, 전문지식을 쌓도록 한다. 졸업후 곧바로 현장에 뛰어들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되는 것이다. 컴퓨터 공학부에서도 3,4학년 때까지는 '전산학의 기초이론' 수준만 배울 수 있다. 고급이론이나 최신 기술동향을 접하기 힘들다. 대학원에 가야 개론수준을 벗어난 이론을 배울 수 있다. 학부 졸업만으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얘기다. 커리큘럼 부실에는 학교측의 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 공대는 학부제를 도입하면서 기초과정 교육을 강화했다. 학부를 대학원 중심대학으로 가기 위한 전단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노하우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 버렸다. 서울 공대인들이 결국 하향 평준화돼 버린 것이다. 산업계에서도 이 점을 지적한다. 산업현장의 니즈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방적인 교육방식만 고집한다. 산업구조가 정보기술(IT) 중심으로 바뀌었지만 교육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최근 서울대 개혁자문단(의장 로좁스키 미국 하버드대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90%의 학생이 "학교가 사회진출에 필요한 교육을 해주지 못한다"고 밝혔다. 80%는 "학교가 대학원 진학준비를 적절히 시켜주지 못한다"고 답했다. 전공분야에서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공대라는 이유로 사회과학에 대해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경영 민법 상법 등에 관한 지식은 물어볼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서울공대 출신 신입사원들은 이중의 고통을 받는다. 이는 한국에서만 일어났던 현상이 아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골칫거리의 하나였다. 그래서 아예 대학커리큘럼도 인증을 받게 했다. 미국에서는 커리큘럼 등 공학교육을 인증하는 기관(ABET)이 지난 1932년 설립됐다. 그러나 한국은 99년부터 공학교육 인증제를 실시했다. 지난해까지 인증받은 것은 고작 영남대 동국대 등 2개 대학의 공학커리큘럼 뿐이다. 일부에서는 교과과정이라는 틀도 중요하지만 강의 내용이 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주입식 강의에서 벗어나 그룹활동이나 프로젝트 등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 생각하고 이론을 실제에 적용할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현재와 같은 커리큘럼으로는 교육과 산업현장간 괴리가 심해질 수 밖에 없다. 이는 결국 인력의 양적 질적 균형을 무너뜨릴 것이다. 커리큘럼 개편 없이는 서울공대 출신들의 실력과 기를 살릴 수가 없다. <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