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노동운동가,시인,벤처기업가,국회의원,장관...

한 사람이 이처럼 다채로운 이력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것도 46세의 젊은 나이에.

김영환 과학기술부 장관은 스스로 "비주류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서 음식점 주방장의 4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20년 넘게 호흡기 질환을 앓은 부친의 병수발로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가난의 해방구로 그가 선택한 것은 치과대.

"가난 탈출"을 목표로 천신만고 끝에 상경했지만 유신시절의 암흑기에 학내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

2년여간 수감생활 중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하루 한편씩 시를 외우다가 직접 쓰기 시작해 시인이란 직함도 갖게 됐다.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시집이 바로 베스트셀러가 된 "똥먹는 아빠"다.

1979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복학생대표자협의회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수배자가 됐다.

그는 이 시기에 노동현장에 투신한다.

경기도 부천을 중심으로 그는 소위 "위장 취업자"와 함께 노동운동을 했다.

그에게 노동은 곧 생계였다.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진짜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전기공사 1,2급및 소방설비기사 1급 등 모두 6개의 자격증을 땄다.

노동운동을 하는동안 병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병원에 입원하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신원조회 탓에 직장에서 쫓겨나기를 여러차례,그는 다시 치대생으로 돌아갔고 입학한지 15년만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치과병원을 개원했고 91년 전기전자 벤처회사를 설립,벤처기업가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 또다른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지난 96년 민주당 입당 결정이었다.

부대변인,정세분석실장,대변인을 역임하면서 성실한 의정활동으로 역량을 인정받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의 터줏대감으로 활약하면서 특히 원자력 안전 문제를 집중 추궁,"원자력 전문의"란 별명을 얻었다.

이제 그에게는 국가예산의 5%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맡겨져 있다.

김남국 기자 n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