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가 조선 세종시대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모르는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1910년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유지는 측우기가 1638년 이탈리아의 베네데토 카스텔리가 만든 우량계보다 2백여년 앞서 발명됐다는 것을 프랑스에 소개했다.

이러한 사실은 1911년 영국기상학회지와 저명한 과학잡지 ''네이처''에도 실렸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측우기를 자국에서 만든 것으로 오해했다.

측우기의 받침대에 새겨진 ''건륭경인오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는 글자를 보고 청나라 건륭 35년(영조 46년) 5월에 만들어 조선에 보낸 것으로 착각한 것.

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중국의 연호를 썼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아 빚어진 오해였다.

1983년 중국에서 나온 ''중국기상학사''를 비롯한 몇 권의 저서에는 아예 이 측우기 사진이 중국의 발명품으로 표지에 실리기도 했다.

측우기 제작 배경은 세종이 농정쇄신을 통해 백성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시작한 천문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은 전국 각지의 비 온 뒤 젖은 흙의 깊이 조사를 통해 농토에 스며드는 수량(浸透水量)과 농사의 관련성을 연구했다.

세종 23년 4월 세자(뒤에 문종)는 삽으로 흙을 파서 빗물이 스며든 깊이를 재는 대신 구리로 그릇을 만들어 궁중에 설치하고 ''빗물을 재는 실험''을 했다.

이 실험이 측우기가 발명되는 계기가 됐다.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깊이 1척5촌(3백10.5㎜),지름 7촌(1백44.5㎜)인 우량계와 2척(4백14㎜)짜리 자를 제조해 서울과 각 도·군·현에 보급했다.

이때부터 비가 내린 후 수령이 직접 계량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측우제도가 확립됐다.

측우제도는 한동안 뜸했다가 영조시대에 복원됐다.

이로써 한국은 1770년 이후 서울에서만 현재까지 2백30년 동안 우량을 기록한 세계초유의 나라가 되기도 했다.

측우기의 밑지름 1백44.5㎜는 빗물을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 크기로 현재 세계 각국이 택하고 있는 평균적인 크기와 일치한다.

빗물을 받는 윗면이 너무 넓으면 비의 양이 적을 때 측정오차가 커지고 반대로 너무 좁으면 바람이 불 때 빗물을 그릇 안으로 받는데 부적합하다.

세종의 측우기는 마치 현대기술을 사용한 듯 아주 적당한 크기였음을 알 수 있다.

1957년 당시 상공부는 세종 24년 5월 19일(정묘)에 전국적으로 측우제도를 시행한 날을 기념,5월19일을 ''발명의 날''로 정했다.

남문현 건국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