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은 한국기술사학회와 공동으로 조상들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현대 시각에서 조명하는 "전통속의 첨단과학"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선조들이 남긴 첨성대 석굴암 측우기 거북선 인쇄술 등은 당대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고 그 안에는 현대 과학을 압도하는 오묘한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우리 민족의 우수한 과학성과 창조성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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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루는 자동시보장치를 갖춘 물시계다.

그러나 단순한 물시계가 아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아날로그신호를 디지털신호로 변환시켜 주는 AD변환기,그리고 십이시(十二時)와 경점(更點)에 맞춰 고안된 논리장치와 연산장치들을 갖춘 디지털시계다.

장영실이 세종의 명을 받아 처음 만든 물시계는 경점지기(更點之器)라는 것이었다.

이 시계는 항아리를 층층이 세운 다음 맨 위 항아리에 물을 채워 차례로 흐르도록 함으로써 가장 아래에 있는 물 항아리에 띄운 잣대가 물의 부력으로 떠오르면 여기에 새긴 눈금을 읽어 시각을 알아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물시계는 밤낮으로 사람이 지키고 있다가 잣대의 눈금을 읽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만들어진 게 자격루였다.

자격루는 사람이 눈금을 일일이 읽지 않고도 때가 되면 저절로 시각을 알려 주는 자동 물시계였다.

그렇다면 자격루는 시간이 되면 어떻게 자동으로 시각을 알렸을까.

자격루는 시간을 측정하는 물시계,측정된 시간을 종 북 징소리로 바꿔 주는 시보장치,물시계와 시보장치를 접속해 주는 방목(方木)이라는 디지털 신호발생장치로 구성돼 있다.

시보장치에는 3개의 시보인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종을 울려 십이시를 알려 준다.

시간이 돼 인형이 종을 울리면 곧이어 시보장치 안에서 십이지신 가운데 그 시에 해당되는 동물인형이 팻말을 들고 나온다.

즉 자시(오후 11시∼오전 1시)에는 자시를 상징하는 쥐가 ''자''자가 적힌 팻말을 들고 나와 지금 울린 종소리가 ''자시''임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나머지 2개의 인형은 밤시간에만 경점의 숫자대로 북과 징을 울려 주는데,1경 1점에서 북과 징을 울리기 시작하여 5경 5점까지만 작동된다.

예를 들어 3경 1점이 되면 북을 3회,징을 1회 울려 준다.

이와 같은 자격루의 탄생으로 당시 통행금지제도인 인정·파루(人定罷漏)가 비로소 제대로 시행될 수 있었다.

<남문현 건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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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설명 ]

<>경점 : 조선시대에 밤시간을 나타내는 시간제도로 1경에서 5경까지 있다.

1경은 오후 7∼9시이고 5경은 오전 3∼5시이다.

각 경은 5점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3경 1점은 지금으로 따지면 오후 11시24분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