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에 기후 변화나 인권 문제와 관련된 조치를 요구하는 주주 행동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9일 보도했다. 기업들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관련 투자가 정치적 논란거리로 활용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행동에 신중함을 기하는 주주들이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FT는 비영리 데이터 제공업체인 지속가능한투자연구소(Sustainable Investments Institute‧Si2)를 인용, 올해 들어 5월 말까지 미 기업들의 연례 주주총회에서 기후 변화 관련 요구가 주주들로부터 평균 23%의 지지를 받았다고 전했다. 2년 전 이 수치는 50%가 넘었지만, 지난해 36.6%로 하락한 뒤 올해까지 2년 연속 뒷걸음질했다.

인권 관련 주주제안도 2020년 이후 3년 만에 지지율이 하락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약 33%의 주주가 인권 문제에 관심을 보였지만, 올해는 21.6%만이 지지를 나타냈다.

올해 미국에서 환경‧사회 문제와 관련된 주주의결사항 중 과반수 지지를 얻은 경우는 5건에 불과했다. 2021~2022년에는 35건 넘는 결의안이 과반의 표를 확보했었다.
자료=파이낸셜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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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자산운용사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스의 스튜어드십 부문 책임자인 벤자민 콜튼은 “특히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보를 보다 투명하게 공개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는 가운데 지나치게 규범적인 주주제안이 등장하는 경우가 잦아지는 추세”라며 “주주들은 이런 이유로 환경‧사회 문제와 관련된 주주제안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경향은 아마존, 엑손모빌, UPS 등 기업에서 실제로 확인됐다. 아마존 주총에서 플라스틱 패키지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과 관련해 더 많은 정보를 요구하라는 결의안에 대한 지지율은 지난해 50%가량에서 올해 33% 미만으로 떨어졌다. 파리기후협약 목표에 맞춘 탄소배출 저감 계획을 짜야 한다는 제안에 찬성한 엑손모빌 주주 비율은 같은 기간 28%에서 11%로 줄었다. 배송업체 UPS 주총에서도 다양성과 형평성, 포용성 관련 제안을 지지한 주주 비율이 37%에서 25%로 쪼그라들었다.

이밖에 테닛헬스케어, 일라이릴리, 아메리칸익스프레스 등의 주총에서 낙태 관련 주주제안이 12%에 못 미치는 지지를 얻었다. 보험사 트래블러스에선 새 화석 연료 프로젝트 추진을 중단해달라는 요구에 대한 지지율이 8.8%에 그쳤다.
자료=파이낸셜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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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제안은 일반 주주들이 주총 안건을 직접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종교 단체나 환경 운동가 등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투자자들의 주요 행동 수단으로 사용돼 왔다. 2021년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관련 규제를 완화한 것을 계기로 주주제안은 급증하는 추세를 나타냈다. ESG 관련 리서치 그룹인 ESGAUGE에 따르면 올해 역대 가장 많은 수의 주주제안이 제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주주제안에 부응해 기업들은 ESG 투자를 꾸준히 늘리자 이를 문제 삼는 목소리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2024년 미 대선 출마 후보인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주 주지사가 대표적인 반(反) ESG 인사다. 지난달 그는 플로리다주 연금기금이 오로지 “금전적 요인”에 의해서만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해 12월 상원 소속 공화당 의원들이 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스트리트 등 자산운용사들을 향해 "사회적 목표 달성을 위해 주주 투표권을 이용한다"고 비난한 일도 있었다.

미 경제조사기관인 컨퍼런스보드의 마테오 토넬로 전무는 “대형 자산운용사들은 정치적 압박이 자사의 투표 관련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백래시(역풍)에 대한 우려는 그들을 더욱 신중하고 민감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컨설팅펌 파리엔트어드바이저스의 브라이언 부에노는 “주주 제안은 점점 더 규범적인 경향을 띠며, 효력을 잃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 외 지역에선 ESG 관련 주주제안이 힘을 얻고 있는 분위기다. 데이터 제공업체 딜리젠트(Diligent)에 따르면 유럽 기업 주총에서 환경, 사회 문제 관련 주주제안에 대한 지지율은 2021년 5.5%, 2022년 10.6%에서 올해 11.6%까지 높아졌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