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탕감 대신 거북이 지켜줘"…英 자산운용사의 통 큰 베팅

이달 초 에콰도르 정부가 스위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와 자연-부채 교환(debt for nature swap) 거래를 체결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기존 에콰도르 국채의 일부를 환경채권으로 바꾸기로 했다.
대신 조건이 붙었다. 에콰도르 정부는 본토에서 서쪽으로 약 1000km 떨어진 갈라파고스 군도의 자연 보호에 투자하기로 했다. 에콰도르 정부에도 반대급부가 있다. 채무 탕감 효과다. 이번 거래를 주도했던 구스타보 만리케 에콰도르 외교부 장관이 갈라파고스에 서식하는 9000여종의 동물들이 자국의 화폐와 진배없다고 한 이유다.
사실상 디폴트지만…"누이좋고 매부좋고"
영국 최대 자산운용사 리걸앤제너럴(LGIM)은 25일(현지시간) "에콰도르 정부의 '갈라파고스 채권'에 2억5000만달러(약 33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제이크 하퍼 LGIM 투자매니저는 "포용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동시에 수익률도 낼 수 있는 투자라고 판단했다"며 "리스크 방어가 가능한 한 우리는 앞으로도 전 세계 국가들의 자연-부채 교환 거래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앞서 지난 4일 크레디트스위스는 에콰도르 정부가 발행한 액면가 16억3000만달러 규모의 국채를 매입한다고 발표했다. 에콰도르가 향후 18여년에 걸쳐 갈라파고스 생태계 보호에 총 3억2300만달러를 지출하는 조건으로, 매입한 국채를 6억5600만달러 갈라파고스 채권으로 교환해주기로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LGIM가 갈라파고스 채권의 초석 투자자가 됐다"며 "LGIM의 참여는 획기적이고 실험적인 자산군에 관한 운용사들의 관심이 더욱 커질 것이란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갈라파고스 채권에 에콰도르 자체 신용등급(Caa3·정크등)보다 16노치 높은 Aa2를 부여했다. 다만 "갈라파고스 채권이 상당히 할인된 가격에 전환됐다는 점에서 이번 거래는 사실상 디폴트(채무불이행)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개도국 탕감+환경보호에 만병통치약 될까
갈라파고스 채권은 역대 최대 규모의 자연-부채 교환 거래다. 자연-부채 교환 방식은 1980년대 처음 등장했다. 그동안은 주로 선진국이나 환경보호 비정부기구 등이 거래를 중개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민간에서는 크레디트스위스가 처음 앞장서기 시작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벨리즈(2021년·3억6400만달러), 바베이도스(2022년·1억4650만달러) 등 카리브해 국가들을 위한 자연-부채 교환 거래를 구조화하기도 했다.에콰도르 정부는 "아마존 열대우림에 관해서도 이 같은 메커니즘을 토대로 부채 구조조정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가봉, 스리랑카, 콜롬비아 등도 자연-부채 교환 방식의 이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패트릭 비거 UC버클리대 연구원은 "개발도상국은 기후변화의 주범국이 아니지만 그 피해를 가장 크게 받는다는 모순이 있다"며 "갈라파고스 채권으로 탕감된 부채 규모는 에콰도르가 지고 있는 전체 부채 규모에 비하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에콰도르의 공공부채 규모는 지난해 기준 약 755억달러에 달한다. 부채 상환을 통해 탕감된 비용 중 일부만 환경보호에 사용된다는 점, 전통적인 부채 탕감 조치보다는 덜 유리한 점 등도 장애물로 거론됐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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