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저성장의 덫에 빠진 영국이 50여 년 만에 다시 ‘유럽의 병자’ 자리에 오를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지속적인 긴축 정책에도 미국과 서유럽 주요국 대비 높은 물가상승률을 유지하면서 ‘영국병’에 맞먹는 경제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25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전날 영국 통계청은 4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7% 올랐다고 발표했다. 전월(10.1%)보다는 둔화했지만 영국 중앙은행(BOE)이 제시한 전망치(8.4%)를 웃돌았다. 식품과 에너지 등 변동성이 큰 품목을 제외한 근원 CPI의 전월 대비 상승률은 6.8%로 전월(6.2%)보다 확대됐다. 지난 3월 45년 만에 최고치(19.2%)를 기록한 식품 물가가 4월에도 비슷한 수준(19.1%)을 이어가면서 전체 물가를 끌어올렸다.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 평균(7%)보다 훨씬 높다. 서유럽 국가 중 물가상승률이 8%를 넘는 국가는 영국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뿐이다. 미국에서도 CPI 상승률은 10개월 연속 하락해 4.9%로 둔화한 상태다.

FT는 현재 물가 상황이 영국병이 만연했던 1970년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영국 경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병이란, 과도한 복지 지출로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초래되면서 사회 전반을 무기력한 분위기가 잠식했던 현상을 의미한다. 경기침체(stagnation)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이 공존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다.

영국 물가에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여파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같은 날 런던정치경제대(LSE)는 2019~2023년(3월) 영국의 식품 가격이 25% 오르는 동안 브렉시트로 생긴 무역 장벽이 8%포인트만큼 기여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CPI 발표 직후 추가 금리 인상에 대한 기대가 퍼지면서 영국의 국채 수익률이 급등했다. 2년 만기 국채 금리는 이날 0.24%포인트 오른 4.37%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9월 리즈 트러스 전 총리 집권 당시 ‘미니예산’으로 초래된 경제 위기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