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판 출간 앞두고 프랑스 방문…파리·리옹 오가며 독자들 만나
"강의 좋아하지만, 차별의 온상인 대학에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작가 정보라 "부커상 덕에 무서운 이야기 잔뜩 쓸 수 있어 좋다"
"누가 제 얘기를 좋아해 준 적이 별로 없고, 작가로서 이런 관심을 받아 보는 게 처음이라서…. 부커상 이후로 마감이 늘어 체력적으로 지치는 면이 있긴 한데,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죠. 무서운 이야기를 잔뜩 쓸 수 있다는 것은 너무 좋아요.

오늘은 어떤 캐릭터를 죽일까, 하면서 말이죠. (웃음)"
한국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작가 정보라(47)는 '저주 토끼'로 지난해 이맘때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로 오르며 전 세계에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정 작가 말로는 2017년 책을 처음 출간했을 땐 한국에서도 잘 팔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제는 다양한 언어로 번역돼 프랑스를 비롯한 18개국에 출간됐다.

'저주 토끼' 프랑스어판 출간을 기념해 프랑스를 찾은 정 작가는 3월 30일부터 4월 3일(현지시간)까지 파리와 리옹을 오가며 프랑스 독자들을 만났다.

지난 1년 사이 수많은 나라를 오간 그일 테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좋아해 주는 외국인 독자들을 대면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 그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며 웃었다.

최근 파리에서 만난 정 작가에게 '저주 토끼'의 프랑스 출간 소감을 묻자 "아직도 꿈속에 있는 듯 어리둥절하다"며 "번역이 정말 중요한데 번역가 선생님들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답했다.

튀르키예 등 독자 반응이 좋은 나라들을 보면 "번역이 물처럼 매끄럽게 흐른다"는 평가가 함께 따라온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저주 토끼'를 출간한 나라가 다양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에피소드에도 각기 다른 특징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번역가가 '저주 토끼'에 실린 다섯 번째 단편 '안녕, 내 사랑'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로봇의 성별을 궁금해했다는 점이 "프랑스어 번역가다웠다"고 회상했다.

정 작가는 원작에서 주인공이 사랑에 빠진 인공 반려자 '1호'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유추할만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성별에 따라 인칭대명사를 달리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하면 해당 인물의 성별을 알아야 할 때가 있다.

프랑스어에서는 주어의 성에 따라 뒤따라오는 형용사와 명사 형태가 바뀌기도 한다.

"영어판을 번역한 안톤 선생님도 성별을 물어보셨어요.

저는 1호의 성별이 모호한 편이 분위기를 더 특이하게 해줄 것 같아서 일부러 특정하지 않으려 했거든요.

콜롬비아에서도 며칠 전에 스페인어판 소설집 '씨앗'이 나왔는데, 이때도 번역가 선생님이 작품 하나하나마다 '얘는 남자냐, 얘는 여자냐' 물으시더라고요.

"
인칭 대명사를 쓰지 않거나,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랬을 경우 별문제 없이 넘어가도 될 문장을 독자가 '작가한테 무슨 의도가 있나 보다'하고 의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정 작가는 이런 이유로 성별 구분이 명확한 언어에서는 번역가에게 성별 판단을 맡겼다.

영어판에서는 인공 반려자 '1호'를 여성(she)으로 표현한 것과 달리 프랑스어판에서 '1호'는 남성(il)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개발한 다른 로봇들이 '세스', '데릭'이라는 영어 남성 이름으로 불리는 점을 감안해 이같이 결정했다는 게 프랑스어 번역가의 설명이었다고 한다.

중국어판에서는 검열 때문에 표현이 바뀌기도 했다.

'저주 토끼' 속 열 번째 단편 '재회'에서 주인공이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생존한 할아버지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해가 지고 나면 밖에 놀러 나가지 못하게 막으니 "전쟁은 오래전에 끝났고 공산주의도 무너졌고…"라며 외치는 대사였다.

"중국 측에서 검열이 있기 때문에 내용을 변경해야 할 수도 있다고 미리 말씀을 주셨어요.

'공산주의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무리이니 '세상이 바뀌었다'로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이 이야기를 듣고 한참 웃었는데, 이 일화를 폴란드 북토크에서 들려줬더니 다들 크게 웃더라고요.

공산주의가 끝난 나라가 바로 폴란드니까요.

"
작가 정보라 "부커상 덕에 무서운 이야기 잔뜩 쓸 수 있어 좋다"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정 작가는 한때 교수를 꿈꿨지만, 2010년부터 2021년까지 모교인 연세대에서 러시아어, 러시아 문학 등을 가르치는 시간 강사로 일하다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연세대가 비정규직 시간 강사라는 이유로 지급하지 않은 퇴직금과 주휴·연차수당 등 5천만원을 지급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정 작가는 4월 19일 1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면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대법원까지 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학교 측 대응에 변화가 있었냐고 묻자 "작년 여름방학 무렵 뜬금없이 퇴직금을 입금해줄 테니 IRP 계좌를 알려달라는 문자와 메일이 반복적으로 계속 들어왔다"며 "12년 동안 재직하면서 IRP 계좌에 대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무슨 소린가 싶었다"고 답했다.

정 작가는 "제 강사료를 입금한 계좌를 학교 측에서 분명히 알고 있으니, 퇴직금을 지급하려면 그 계좌로 보내거나 일반 은행 계좌를 물어보면 될 텐데 IRP를 못 박은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답변을 할 수 없어 응대하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후일에 다른 대학에서라도 교편을 다시 잡을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봤으나 정 작가는 회의적이었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차별과 권위적인 위계질서를 보수적으로 지키는 온상으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답변 속에 단호함이 묻어났다.

"제가 가치 있다고 믿는 정보를, 가장 흥미로운 방법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굉장히 좋았어요.

하지만 학교 시스템으로 들어가면 제가 누군가의 가해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그런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것 교육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
지난해 4월 기자간담회에서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데모"라고 답할 만큼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정 작가는 현실에서 소재를 얻어 집필하는 작품 속에서도 이러한 신념을 투영하고 있었다.

"저는 저를 위해서 글을 쓰지만, 독자들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한다면 사회적으로 불의한, 부당한 일을 당했거나, 고통을 겪고 계시는 분들한테 더 해를 끼치지 않는 이야기를 쓰려고 해요.

나쁜 짓을 한 사람은 죽는 그런 이야기를요.

"
작가 정보라 "부커상 덕에 무서운 이야기 잔뜩 쓸 수 있어 좋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