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 통화 가치가 32년 만의 최저 수준까지 떨어지면서 안전자산의 지위를 내려놓는 듯하던 일본 엔화가 위상을 되찾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금융시장 불안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리면서 3월 들어 통화 가치가 주요국 통화 가운데 가장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금융시스템 불안 안전지대

SVB發 불안에…엔화, 안전자산으로 귀환
블룸버그통신은 “미국 달러와 스위스프랑이 주춤하는 사이 엔화가 안전자산의 지위를 되찾고 있다”고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난해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24% 하락했다. 하락폭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작년 9월 말 일본 재무성과 일본은행은 24년 만에 처음 엔화를 매수하는 방식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21일 엔화 가치는 달러당 151엔까지 떨어지면서 32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30일 도쿄외환시장에서는 달러당 132엔 선에 움직였다. 작년 말부터 조금씩 회복세를 타던 엔화 가치는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크레디트스위스(CS) 경영위기 등으로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이 가중되면서 크게 올랐다. 다케베 리키야 오카산증권 선임전략가는 “글로벌 투자자금이 금융 시스템 불안의 불똥이 튀지 않은 엔화를 도피처로 선택하면서 3월 들어 엔화 가치가 거의 모든 주요국 통화에 비해 올랐다”고 설명했다.

주요국의 통화 가치를 종합한 닛케이통화지수에 따르면 3월 한 달간 엔화는 3.2% 상승했다. 25개 주요 통화 가운데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유로와 태국 밧, 중국 위안화가 1% 안팎의 오름세로 뒤를 이었다. 한국 원화도 0.5%가량 올라 다섯 번째로 가치가 많이 오른 통화였다. 가치가 많이 상승한 5개 통화 가운데 4개가 아시아 지역 통화였다. 아시아 지역이 상대적인 안전지대로 평가받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금융시장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의 달러 가치는 1%가량 하락했다.

엔화 강세는 해외투자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일본 재무성이 지난 24일 발표한 대외·대내 증권투자 현황에 따르면 해외투자자들은 3월 12~18일 1주일 동안 4조엔(약 39조원)어치의 일본 국채를 순매수했다. 주간 기준으로 사상 최대 규모다. 위험 회피 수단으로 일본 국채를 사려는 해외투자자들이 몰리면서 엔화 수요도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엔화 가치를 추락시킨 원인인 일본은행의 ‘나홀로 금융완화’가 올해는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분석했다. SVB 파산, CS 합병 등 금융시장 시스템이 휘청인 이유가 주요국 중앙은행의 급격한 금리 인상이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지난해 미국 중앙은행(Fed)과 유럽중앙은행(ECB)은 경쟁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국채 투자에 적극적이던 금융회사들의 평가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금리와 반대로 움직이는 국채 가격이 급락한 탓이다.

그 결과 글로벌 투자자금이 조금이라도 가격 하락의 위험이 낮은 자산으로 몰리고 있다고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일본은행이 10년째 대규모 금융완화를 유지한 영향으로 일본 국채는 가격 하락의 위험이 낮은 자산으로 분류된다.

엇갈리는 엔 환율 전망

엔화 강세가 계속될지에 대해서는 일본과 해외 전문가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일본 전문가들은 엔화 가치가 계속 오르기 어려울 것으로 봤다. 일본의 무역수지 적자가 급격히 불어나면서 기업의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려는 수요가 늘고 있어서다. 지난 2월까지 일본의 무역수지는 19개월 연속 적자를 이어갔다.

해외 전문가들은 당분간 엔화 가치가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모건스탠리는 엔화 가치가 120엔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은행은 출구전략에 나설 것으로 베팅하는 해외 헤지펀드도 늘고 있다. 밴 루 러셀인베스트먼트 외환책임자는 “지난해 엔화 가치가 극단적인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올해는 가장 많이 오르는 통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