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전후 일본 양심의 타계와 징용 피고기업의 침묵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을 사흘 앞둔 지난 13일.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建三郞)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88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인은 한일 간 역사 문제에 대해서 일본이 전후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며 일본의 각성을 촉구해 왔다.

한국 정부가 지난 6일 발표한 일제 강제징용 해법에 대해 제대로 호응하지 않은 일본 정부와 더는 배상과 사죄할 게 없다는 징용 피고 기업의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되면서 오에의 별세는 다시 한번 그의 빈자리를 느끼게 했다.

오에는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1994년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성으로 승화시킨 뛰어난 문학 작품으로 뿐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으로도 한국에 잘 알려졌다.

1935년 에히메현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도쿄대 불문학과 재학 중인 1958년 단편소설 '사육'으로 당시 최연소인 23세에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런 그에게 약자를 돌아보고 이들을 대변하며 행동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1963년 장애인 아들의 출생이었다.

오에는 자신의 아이가 눈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희망을 품고 아들 이름을 '히카리'(빛)라고 지었다.

장애아의 출생이라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그는 히로시마의 핵무기 반대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그는 히로시마 피폭 생존자들도 장애아를 낳을지 모른다는 자신과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를 계기로 원폭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면서 히로시마 피폭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포 작품 '히로시마 노트'를 썼다.

그는 히로시마 방문 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자를 위해 글을 쓰고 행동하며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이야기를 하겠다는 두 가지 결심을 했다.

피폭자라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그의 태도는 일본 군국주의 피해를 본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라는 다른 약자들에게도 일관되게 이어졌다.

오에는 2차 아베 신조 정권 때인 2015년 한국을 방문해 "일본은 아무리 사죄해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막대한 범죄를 한국에 저질렀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 일본의 후진성을 인정해야 한다"며 "일본 정부나 국민이 충분히 사죄했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 국가가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비판해온 그는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해에 일왕이 주는 문화훈장을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특파원 시선] 전후 일본 양심의 타계와 징용 피고기업의 침묵
일본 정부와 징용 피고 기업이 이달 보여준 모습은 오에와는 정반대다.

기시다 총리는 16일 한일 정상회담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포함한 역사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에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만 말했다.

사과라고 한 발언이지만, 한일 공동선언에 담긴 '사과'와 '반성'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징용 피고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도 징용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한국 정부가 이달 강제징용 배상 해법을 발표한 뒤 연합뉴스가 이에 대한 입장을 묻자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에 대해 "그런 일을 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양사는 한일 정상회담에 맞춰 이달 16일 한국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일본 게이단렌(經團連·일본경제단체연합회)이 창설하기로 한 '한일·일한 미래 파트너십 기금' 참여 여부에 대해서도 "당사는 게이단렌 산하 기업으로 앞으로 파트너십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것"이라며 참여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전경련과 게이단렌의 기금 조성은 한국이 발표한 강제징용 해법의 실행을 뒷받침하는 성격이 강한데 이마저도 참여 여부를 밝히지 않은 것이다.

일본에는 과거사에 대해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양심적인 인사들과 역사 문제는 모두 해결돼 더는 과거 잘못에 관해 이야기도 하기 싫다는 세력이 함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특파원 시선] 전후 일본 양심의 타계와 징용 피고기업의 침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