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연금제도 개혁을 위해 하원의 투표 절차를 생략하는 헌법 조항을 발동했다. 의회와의 정치적 타협 없이 일방적인 입법을 강행한 것이다. 당장 범야권은 내각 불신임안을 들고나왔다. 프랑스 노동계는 오는 23일 아홉 번째 대규모 시위를 예고하는 등 반발도 커지고 있다.

두 차례 회의 후 개혁 강행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는 16일(현지시간) 하원에 출석해 “연금개혁안에 대한 하원 표결을 건너뛰기 위해 헌법 제49조 제3항(이하 49-3)을 사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가 지난 1월 하원에 제출한 원안이 아니라 지난 두 달 동안 여러 정당이 함께 작성한 수정안을 채택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연금개혁 의회 패싱한 마크롱…佛야당은 "내각 불신임"
이번 연금개혁안에는 정년을 현행 62세에서 2030년까지 64세로 연장하는 내용이 담겼다. 연금을 100% 수령하기 위해 근무해야 하는 기간을 기존 42년에서 2027년까지 43년으로 늘린다는 내용도 들어갔다. 대신 노동시장에 일찍 진입하면 조기 퇴직할 수 있고, ‘워킹맘’에게 최대 5% 연금 보너스를 지급한다는 일부 수정 제안들이 포함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당초 우파 성향의 공화당을 설득해 입법을 추진하려 했다. 하원 전체 577석 가운데 여당 르네상스 등 여권 의석수는 250석에 불과해 절반에 미치지 못하지만, 공화당 의석(61석)을 더하면 하원 통과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오전과 오후 두 차례 대책회의를 한 끝에 하원 투표 절차를 생략하는 우회로를 택했다. 자체 조사 결과 부결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법안이 부결됐을 때 감당해야 하는 경제·재정적 위험이 너무 크다”며 “국가의 미래를 걸고 장난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영방송 프랑스24는 “마크롱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라고 믿는 연금개혁법을 위해 ‘핵폭탄급’ 승부수를 던졌다”고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마크롱 정부의 입법 강행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연금개혁에서 얼마나 큰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전했다.

불신임 가능성 낮아

야권과 노동계는 즉각 반발했다. 보른 총리가 하원에서 연설하는 동안 야당 의원들이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고 야유하며 총리의 발언을 방해하는 장면도 연출됐다.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과 좌파 연합 뉘프 등은 불신임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이원집정부제를 택하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정부의 조치에 반대하는 의원이 24시간 안에 내각 불신임안을 발의할 수 있다. 이는 헌법상 대통령을 겨냥한 탄핵과는 다르다. 하원 의원의 과반에 해당하는 289명의 찬성을 얻는다면 법안은 취소되고, 총리가 이끄는 내각 인사는 총사퇴해야 한다. 반대로 불신임안이 부결되면 해당 법안은 바로 발효된다.

현재로서는 불신임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나온다. 61석을 보유한 공화당의 에리크 시오티 대표가 “정부의 일방적 입법에는 반대하지만 정국 혼란을 가중하는 불신임에는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으면서다. 프랑스에서 제5공화국 출범 후 지금까지 100여 차례 제출된 내각 불신임안 가운데 실제 가결된 것은 단 한 건에 불과하다. 불신임안이 가결되더라도 마크롱 대통령에겐 곧바로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으로 맞설 수 있는 카드가 남아 있다.

마크롱 대통령의 향후 최대 과제는 “정부의 행보가 공익과 직결된다”는 점을 들어 국민을 설득하는 일이 될 것이란 관측이다. 뉴욕타임스는 “프랑스에서는 더 일해야 한다는 정년 연장을 형벌의 일종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며 “많은 시민이 이번 입법을 삶의 방식에 대한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여기는 이유”라고 했다. 프랑스는 유럽 주요국 가운데 연금 수령 연령이 가장 낮아 연금개혁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