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로 인한 소비 둔화 우려가 증폭되고 있지만 미국 기업들은 고급화 경쟁에 나섰다. 인플레이션과 공급망 혼란이 완화되면서 가격을 인상할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진율을 유지하기 위해 고가 제품을 대거 내놓을 거란 분석이다.

4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대기업이 실적을 유지하기 위해 고급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소득층 고객을 겨냥한 프리미엄 제품 및 서비스를 이전보다 더 많이 내놓을 거란 전망이다.

NYT에 따르면 지난 3주간 미국 대기업들의 실적발표회(컨퍼런스 콜)에서 60건 이상 '프리미엄화(고급화)' 전략이 언급됐다. 미 카드업체 아메리칸익스프레스의 스티븐 스쿼리 최고경영자(CEO)는 "고소득층 고객은 경기침체가 찾아와도 소비를 줄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크리스피크림도 지난해 펼쳤던 할인 정책을 폐기하고 프리미엄 도넛 제품군을 강화할 방침이다.

공구업체도 고급화 경쟁에 합류했다. 'WD-40'이란 윤활유로 유명한 WD40의 스티브 브라스 CEO도 "스마트 분사기를 부착한 프리미엄 제품을 선보일 것"이라며 "고급화 전략을 통해 매출을 키우고 마진율을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이 앞다퉈 고급화 경쟁에 나선 이유는 경영환경이 변하고 있어서다. 지표상 인플레이션이 지난해보다 완화되고 있는 데다 소비가 정체될 거란 우려가 증폭됐다. 기업 입장에선 별다른 명분 없이 가격을 인상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때문에 고가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부유층 소비자에 집중한다는 설명이다.

컨설팅업체 리핀코트의 데이비드 메이어 파트너는 NYT에 "프리미엄 제품에 지갑을 열 고객층은 여전히 강력하다"라고 역설했다.

미국 소비가 양극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소득 상위 40%는 코로나 팬데믹 동안 총 1조달러 이상을 저축했다. 반면 저소득층 가구의 경우 지출에서 식료품, 주거비 등 필수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는 추세다.

크리스피크림 관계자는 NYT에 "올해는 지난해보다 할인 이벤트를 줄일 것"이라며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등 명절에 맞춰 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제품을 내놓는 게 목표다"라고 설명했다.
사진=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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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과 서비스가 고급화됨에 따라 저소득층 소비자가 외면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진열장에 대규모 할인제품은 사라지고 고가 제품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서다. 기업은 고급화 전략을 통해 소비층을 양분하고 소득 수준에 맞춰 가격을 인상한다. 고가 제품의 생산량을 줄여 희소성을 높인다. 피해는 저소득층 고객의 몫이 된다.

미 차량관리업체 콕스 오토모티브에 따르면 2017년 말 관리 대상 36개 차량의 가격은 평균 2만 5000달러를 밑돌았다. 저가 차량의 판매 비중은 13%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 2만 5000달러 미만인 승용차 모델은 10개에 불과했다. 비중도 4%로 줄었다. 저신용자를 위한 자동차 대출 상품도 시장에서 퇴출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조나단 스모크 콕스오토모티브 이코노미스트는 "부품 관리비용은 오르고 노동력은 갈수록 축소돼 완성차 업체들이 값싼 자동차 모델을 줄이고 있다"며 "공급망 혼잡도와 상관없이 고급 모델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승용차도 부유층의 전유물이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