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PN으로 우회접속…국외 사용자 경유해 전세계에 시위 상황 알려 "새 오너 일론 머스크 시험대 올랐다…테슬라, 中시장 의존 커"
소셜미디어 트위터가 중국 당국의 접근금지 조처에도 중국 도처에서 진행 중인 '백지시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30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트위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고강도 방역 정책 지속을 계기로 시작된 이번 시위 관련 상황을 공유하는 매개체가 돼 왔다.
중국내 소셜미디어에 대한 검열이 강화되자 인터넷 우회 접속 프로그램인 가상사설망(VPN)을 이용, 2009년부터 사용이 금지된 트위터로 시위 관련 정보와 사진, 동영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선 VPN 사용이 불법이지만 현지 젊은 층 상당수는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해외 사이트를 이용해 왔다.
WSJ은 백지시위 참가자들이 당국의 검열에서 자유로운 외국에 머무는 트위터 사용자들을 통해 중국 내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고 전했다.
다수의 팔로워를 보유한 해외 이용자들이 중계역을 맡아 중국 내 시위 참가자들이 보내온 사진과 영상 등을 널리 퍼뜨린다는 것이다.
실제, '리 선생(老師)'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한 트위터 이용자는 백지시위가 시작된 이후 시위 관련 자료가 담긴 메시지를 초당 수십건씩 받고 있다면서, 시위 전까지만 해도 온종일 오는 메시지가 수십건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2020년 5월 중국 내 검열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취지로 계정을 개설한 그는 "일어나 온라인 포스팅을 하고, 고양이 밥을 주는 것이 일과"가 됐다고 말했다.
그의 팔로워 수는 현재 75만9천여명으로 시위 전의 세 배를 넘어섰다.
WSJ은 이러한 상황이 트위터의 새 소유주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시험대에 올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트위터가 자유로운 표현의 장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계정을 복구하는 등 행보를 보여왔다.
하지만, 그가 CEO로 있는 테슬라는 차량생산과 판매에서 중국시장에 크게 의존하는 실정이다.
일본 메이지대학 객원교수인 인권활동가 패트릭 푼은 중국 당국이 시위 관련 자료 공유를 막기 위해 트위터에 압박을 가하거나 관련 계정을 해킹하려 시도할 수 있다면서 "이건 일론 머스크와 트위터가 권위주의 정권의 해킹으로부터 사용자를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시험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 트위터상에선 중국내 시위 관련 키워드 검색에서 봇(bot: 스팸 자동 발송 소프트웨어)을 이용한 가짜 계정으로 올린 것으로 보이는 포르노와 스팸 등이 나오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스탠퍼드대 인터넷 관측소(SIO)의 알렉스 스태머스 소장은 지난달 28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이건 중국내 시위를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정보적 교란 수단을 살포하는 의도적 공격임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WSJ은 트위터가 최근 중국 시위 소식을 중계하던 이용자 일부의 계정을 이른바 '플랫폼 조작과 스팸' 관련 규정 위반을 이유로 정지했다가 논란이 일자 철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견인한 3세대 최고지도자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96세를 일기로 30일 사망했다.마오쩌둥·덩샤오핑 이은 '3세대 최고지도자'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장 전 주석은 30일 낮 12시 13분(현지시간) 백혈병 등으로 인해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다 별세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국무원 등의 공동 발표에 따르면 장 전 주석은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여러 장기 기능이 쇠약해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이날 숨을 거뒀다.당 중앙위 등은 "장쩌민 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군, 각 민족 인민에게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라며 "당 중앙은 모든 사람에게 슬픔을 힘으로 바꾸고 동지의 유지를 계승하며 실제 행동으로 애도를 표하기를 호소한다"고 밝혔다.정 전 주석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였던 덩샤오핑을 이어 집권한 3세대 지도자로 분류된다. 재임 기간 성장 가속, 구조 개혁 등을 통해 중국을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자리에 올려놨다.'2위 경제대국' 견인한 장쩌민 전 중국국가 주석1926년 중국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난 장 전 주석은 상하이 자오통(交通)대학교에서 전기과를 졸업했다. '문화 대혁명' 기간 당과 공직에서 추방당해 10년 동안 피신생활을 하기도 했다.1세대 지도자인 마오쩌둥 사망후 80년대개혁과 개방시대가 열리면서 장쩌민은 본격적으로 정치권 핵심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그가 최고지도자 반열에 올라선 계기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였다. 당시 톈안먼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당 총서기의 뒤를 이어 그는 당 총서기에 올랐다. 이후 1993년 3월 국가주석까지 맡으며 중국 최초로 당(黨)·정(政)·군(軍)의 모든 권력을 거머쥔 뒤 2003년까지 중국 최고 지도자로 재임했다.장 전 주석은 2002년 11월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에게 당 총서기 자리를 물려준 것을 시작으로 다음 해 3월 국가주석직을 이양했지만, 2004년 9월까지 권력의 핵심이라고 평가받는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해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톈안먼 사태라는 격동을 거쳐 최고 지도자에 오른 고인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과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숨긴 채 실력을 키움) 노선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미국 등 서방과의 원만한 관계 속에 중국의 비약적 경제 성장을 일궜다.그가 당 총서기가 된 1989년 1조7200억 위안(약 319조원)이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실질적 임기 마지막 해인 2002년 약 7배인 12조1700억 위안(약 2260조 원)을 기록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한국 방문한 중국 최초의 주석…'한중관계 기틀'고인은 재임 기간 강력한 경제개혁을 실시해 중국의 경제체질을 바꾸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5년에는 중국 최고지도자로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재임 기간 굵직굵직한 정치, 경제, 외교의 이정표를 세웠다.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유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홍콩(1997년)과 마카오의 반환(1999년) 등이 그의 임기 동안 이뤄졌다. 퇴임 이후에도 막강한 정치적 파워를 자랑했지만 시진핑 독체 체제가 시작되면서 전직 국가원수 예우만 받고 있다. 이런 '빛'과 함께 '그림자'도 있다. 민주화 운동가들과 파룬궁에 대한 탄압 등 인권 침해 관련 지적과, 그의 재임 기간 경제 성장의 뒷그늘에서 심화한 빈부격차, 관리들의 부정부패 등은 비판의 소재로 언급된다.장 전 주석의 대표 사상은 '3개 대표 이론'이다. 전통 사회주의 국가에서 배척받는 자본가 계급을 끌어안는 것이 골자다. 이는 2002년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중국공산당 당헌(黨章)에 '3개 대표 중요 사상'으로 정식 삽입됐다. 은퇴 이후에도 상하이방(上海幇·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맥)의 원로로서 중국 정계에 깊숙이 개입하며 현역 지도자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중국 포털사도 '흑백화면'으로 애도시진핑 국가주석 집권기에는 상하이방이 시 주석의 '정적세력'으로 분류되면서 정치적 입지가 약화하기도 했다. 2019년 10월 1일 신중국 건국 70주년 기념식에 등장한 것을 마지막으로 외부 공식 활동을 중단했고, 지난달 열린 제20차 당 대회에도 주석단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불참했다. 유가족으로는 부인 왕예핑 여사, 장남 장멘헝, 차남 장멘캉이 있다.시진핑 국가주석이 주임을 맡은 장례위원회는 '추도 대회'가 열리는 날까지 베이징 톈안먼, 인민대회당, 신화문, 외교부, 해외의 대사관 및 영사관 등에 조기를 게양하기로 했다. 또한 재외공관 등에 빈소를 마련해 외국 인사들의 조문을 받기로 했다. 다만 중국 관례에 따라 외국 정부, 정당, 우호 인사 등의 조문단은 초청하지 않기로 했다고 장례위는 전했다.장 전 국가 주석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온라인 사이트들은 일제히 흑백화면으로 전환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중국 국무원과 외교부 등 주요 정부 기관 인터넷 사이트는 물론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와 관영 매체 홈페이지들 역시 포털화면을 흑색으로 변경했다. 조아라 한경닷컴 기자 rrang123@hankyung.com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 등 주요 도시에서 강력한 코로나19 정책에 반발하는 시위가 잇따르는 가운데 주중 한국대사관이 교민들에게 신변안전 유의를 당부했다.주중 대사관은 30일 오후 재외국민 신변안전 공지를 통해 "중국 각지에서 방역 조치에 대한 시위가 발생하고 있다"며 "군중이 몰린 곳에 접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밝혔다. 이어 "대규모 시위에 불필요하게 연루되면 체류 신분은 물론 신변 안전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16세 이상 외국인은 거류 증명서나 여권을 휴대해 공안기관의 검사에 대비해야 한다'는 중국 관련 법률을 소개하며 유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대사관은 한국인회 및 유학생회 등 교민 단체와 연락체계를 유지하고, 국내외 언론 동향을 수시로 확인하라고 당부했다.조아라 한경닷컴 기자 rrang123@hankyung.com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을 주요 2개국(G2) 반열로 이끈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30일 별세했다. 향년 96세.중국 신화통신에 따르면 장 전 주석은 이날 낮 12시13분 백혈병으로 상하이에서 치료를 받다가 숨을 거뒀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장쩌민 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군, 각 민족 인민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그는 지난해 공산당 100주년 기념식과 지난 10월 20차 당대회에 불참하며 건강 이상설에 휩싸였다. 장례위원장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맡는다.장 전 주석은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마오쩌둥,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3세대 지도자다. 1993년부터 10년간 국가주석으로 중국을 이끌었다.그는 1989년 톈안먼 사태를 거치며 중앙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상하이 시장이던 그는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을 무력 진압한 정부를 옹호하면서 덩샤오핑의 신뢰를 얻었다. 같은 해 장 전 주석은 당 총서기로 발탁됐다. 그는 공산당 총서기(1989~2002년),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1989~2004년), 국가주석(1993~2003년)까지 맡으며 중국 최초로 당·정·군의 최고위직을 거머쥐었다.장 전 주석은 중국 공산당 3대 정파 중 하나로 분류되는 ‘상하이방(上海幇)’ 좌장이었다. 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사로 구성된 상하이방은 시 주석의 파벌인 ‘시자쥔(習家軍)’과 대척점에 있다. 상하이방은 시 주석이 당 지배력을 강화하기 전까지 중국 최고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현재는 정치적 입지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그는 정치적으로 보수 색채가 강했지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을 적극 계승하며 중국 경제 발전의 기틀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 사상은 ‘3개 대표 이론’으로 전통 사회주의 국가에서 배척받는 자본가 계급을 포용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중국은 장 전 주석의 재임 시기인 2001년 미국 중심의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이 영향으로 제너럴모터스(GM) 등 글로벌 기업이 중국 투자를 급속도로 늘렸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장 전 주석의 지휘 아래 중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가 당 총서기에 오른 1989년 1조7200억위안(약 319조원)이었던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2002년 약 7배인 12조1700억위안(약 2260조원)으로 뛰어올랐다.홍콩 반환(1997년)과 마카오 반환(1999년)도 그의 임기 내에 이뤄졌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도 유치하며 중국의 폐쇄적인 국가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데 기여했다.굵직한 성과를 쌓았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톈안먼 시위 참가자에 대한 중국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에 대해 눈 감았다는 점에서 인권 유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1999년에는 종교단체인 파룬궁 신자 수천여 명을 구금하기도 했다.한국과는 인연이 많다. 1995년 한국을 찾은 중국의 첫 번째 지도자다. 장 전 주석의 전임 지도자인 양상쿤 전 주석이 한·중 수교(1992년 8월)를 성사시킨 후 한국을 방문했다.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친분도 각별했다. 그는 사석에서 김 전 대통령에게 “따거(大哥, 큰형님)”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김 전 대통령이 중국과 북한을 겨냥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미사일방어(MD) 시스템 가입 압력을 거부하는 등 중립 외교를 펼친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해석됐다.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