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가 아르헨티나를 2 대 1로 꺾는 이변을 일으킨 가운데, 최근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존재감이 국제 사회에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경제가 불안해지면서 '오일 머니'로 무장한 그의 위상이 '따돌림'의 대상에서 누구나 만나길 원하는 '인싸'(인사이더)로 급변했다는 것이다.

"운명의 변화"

빈 살만 왕세자는 21일(현지 시각) 개막전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옆자리에서 경기를 관전했다. 지난 수년간 그가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극적인 변화라는 평가가 나온다.

22일(현지 시각) 로이터 통신은 '월드컵에서 사우디 왕세자가 세계무대로 다시 돌아왔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빈 살만 왕세자에 대해 "운명의 괄목할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줬다"며 "글로벌 스포츠의 간판격인 대회에서 어떤 귀빈보다 두드러지는 좌석에 앉아 활짝 웃는 모양새가 국제무대 주빈석에 복귀한 사람 같았다"고 전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 인권 억압, 권력 쟁탈전 과정에서의 대규모 숙청, 인도주의 위기를 부른 예멘 내전 개입, 언론 탄압 논란 등 인권 유린 문제로 도마 위에 오르던 인물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그를 국제적 왕따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한동안 사우디가 개최하는 각종 행사 등을 보이콧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글로벌 경제 위기가 그의 입지 바꿨다"

그러나 올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에너지난, 글로벌 인플레이션 등 여러 악재가 동시에 지구촌을 둘러싸자 빈 살만 왕세자의 입지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 원유공급 확대, 물가상승 억제 등에 열쇠를 지닌 거대 산유국으로서 사우디의 영향력이 커진 탓이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3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야기한 세계 에너지 위기와 물가 급등은 중동의 지정학에 뜻밖에 변화를 가져왔다"며 "2018년 발생한 정부 비판 기자 살해 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됐던 처지에서 벗어나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인물을 만나는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강력한 입지를 손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빈 살만 왕세자가 지난 19일 예정이었던 일본 방문을 돌연 취소한 데 대해 이 신문은 한 소식통을 인용해 "왕세자 자신이 이번에 (일본을) 방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도 후보 시절 본인의 말을 뒤집고 지난 7월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에게 원유 증산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연합(EU)을 주도하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같은 달 그와 회동했다.

국제활동 왕성해지는 빈 살만
…곧 시진핑과도 회동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오른쪽)이 17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국내 기업 총수들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출처=사우디아라비아 국영매체 SPA 홈페이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오른쪽)이 17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국내 기업 총수들을 만나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동관 한화솔루션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출처=사우디아라비아 국영매체 SPA 홈페이지
한국에서도 고조되는 경기 둔화 분위기 속에서 17일 방한한 빈 살만 왕세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매우 컸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과도 환담한 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국내 20대 그룹의 총수 8명과 차담회를 가지며 우리 돈으로 약 40조원에 달하는 네옴시티 사업 관련 투자·개발 업무협약(MOU)을 맺고 돌아갔다.

이달 이집트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 빈 살만 왕세자의 국제무대 활동은 갈수록 왕성해지고 있다. 그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도 곧 회동할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미국 법무부는 지난 17일 그에게 민사소송 면책권을 인정해 범죄자 인식을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백악관과 미 국무부는 빈 살만 왕세자가 올해 9월 사우디 정부의 수반인 총리가 되면서 뒤따른 국제법상 관행일 뿐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일각에서는 서방이 에너지 시장 안정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온 유화적 조치라는 진단이 나왔다.

다만 로이터통신은 "그가 서방에서 정치적 재건을 이뤘다고 보기는 아직 이르다"면서 "아직 그는 미국이나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달갑지 않은 방문자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현보 한경닷컴 기자 greaterf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