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가치가 5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지자 일본 통화당국이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외환시장은 당국의 움직임을 ‘공갈포’로 취급하고 있어 엔저(低) 방어 효과는 미미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日, 사상 최대 무역적자까지 덮쳤다…24년 만에 '엔低 방어' 시장개입 하나
15일 일본 미디어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전날 오전 외환거래에 참가하는 주요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호가 확인(레이트 체크)’을 시행했다. 호가 확인은 외환시장의 동향을 조사하는 것으로 시장 개입의 준비 단계로 받아들여진다.

일본 통화당국은 환율을 제어할 때 ‘구두 개입→호가 확인→시장 개입’의 3단계를 밟는다. 필요할 경우 호가 확인 절차 없이 바로 시장에 개입하는 한국은행보다 한 단계를 더 거친다.

전날 달러당 엔화가치가 또다시 145엔 수준까지 떨어지자 일본 외환당국이 행동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올해 엔화는 주요국 통화 가운데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 3월 초 114엔이던 엔화 가치는 반 년 새 30엔(약 20%) 떨어졌다. 일본이 1973년 환율제도를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는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를 가파르게 올리는 반면 일본은행은 경기 부양을 위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고수하는 것이 주원인으로 꼽힌다. 미·일 금리차가 3%포인트 이상 벌어지자 투기세력의 표적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후지시로 고이치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은행이 당분간 금리 인상에 나서지 못할 것이란 예상이 힘을 얻으면서 엔화 가치 하락에 안심하고 베팅할 수 있게 됐다”고 요미우리신문에 말했다.

원자재값 급등 여파로 무역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도 엔화 추락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날 일본 재무성은 8월 무역수지가 2조8173억엔(약 27조4777억원) 적자를 나타냈다고 발표했다. 수입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19개월 연속 늘어나면서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다.

엔화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자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구두 개입의 수위를 높여왔다. 스즈키 준이치 재무상은 전날 외환시장 개입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며 “하게 된다면 지체 없이 단숨에 시행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화당국의 움직임을 ‘시간 끌기’라거나 ‘시장에 개입하려는 시늉’으로 해석하는 시장 참가자가 적지 않다고 아사히신문은 전했다. 미국이 일본의 시장 개입에 동의할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이유에서다. “인플레와의 전쟁에 나선 미국 통화당국은 물가를 낮추는 효과가 있는 달러 강세를 반기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다카하시 오사무 씨티그룹증권 수석외환전략가는 “엔화 가치가 150엔까지 떨어지지 않는 한 시장 개입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다.

시장 개입이 실패로 돌아간 전례도 일본 통화당국을 고민하게 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엔화 강세를 막기 위한 외환시장 개입은 319회 시행된 반면 엔저 방어를 위한 개입은 32회에 그쳤다. 1995년 이후 실시됐던 일곱 차례의 시장 개입 가운데 엔화 약세를 막는 조치는 1998년 단 한 차례뿐이었고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엔화를 매도하는 엔고(高) 대책과 달리 엔저 방어를 위한 시장 개입은 실탄이 제한돼 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정부가 보유한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는 방식이어서 외환보유액의 일부만 개입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8월 말 현재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조2920억달러(약 1800조원)다.

전날 일본은행의 호가 확인 소식이 전해진 직후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는 143엔까지 상승했다. 하지만 ‘일본이 실제 시장에 개입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확산하면서 15일 오후 엔화 가치는 143.5엔까지 떨어졌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