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소된 LG전자 공장 자리엔 철골 기둥만…피해 업주 "다시 폭동 나면 총기 대응"
교민 가발공장, 방화 딛고 '재기'…공동체 자원봉사·기부도 잇따라
[남아공 폭동 1주년 르포] 진원지 더반 평온 속 재발 긴장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 전 7월 폭동의 진원지였던 동부 항구도시 더반은 평온함 속에 활기차 보였다.

남아공은 최근 코로나바이러스 신규 확진자 발생이 수백 명대로 낮은 편이고 방역 규제도 풀려 20일(현지시간) 더반에서 본 시민들은 대부분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이전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인구 약 320만 명의 더반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최대 물동항이다.

폭동이 휩쓸고 간 더반 도심 업무지구(CBD)도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그 이면은 좀 달랐다.

폭동 당시 방화로 전소돼 한국에도 충격을 준 LG전자 공장 자리는 불탄 자리에 철골 구조물 기둥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불탄 공장 자리는 축구장 서너 개 면적은 족히 돼 보였다.

LG전자는 이후 더반 대신 경제중심 내륙 도시 요하네스버그에서 임가공 형태로 공장을 운영 중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물류창고가 피해를 봤으나 아직 더반 공항 근처에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더반 교외 와터크레스트 몰의 한 식당 주인인 로이 제임스(33)는 "폭동 때 우리 가게도 털려 테이블 의자까지 다 부서뜨려놨다"면서 "만약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이번에는 내가 총을 직접 들고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험사 보상도 피해액의 3분의 2 정도 밖에 받지 못했다면서도, 최근 인플레이션 우려를 빼고는 영업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며 애써 웃어 보였다.

[남아공 폭동 1주년 르포] 진원지 더반 평온 속 재발 긴장감
이 식당의 여종업원인 사만사 부시시웨(21)는 "폭동은 나쁜 것"이라며 일자리를 잃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주변에서 폭동 때 물건을 훔쳐 혜택을 본 사람들은 그렇게 나쁘게만 보는 편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이 몰은 폭동 당시 서점만 빼고 전 영업점이 '공짜 쇼핑'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날 찾아본 상가 몰은 약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일인데도 쇼핑객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가게들은 번듯해 보였다.

다만 한 매장은 아직 셔터를 굳게 닫고 있었다.

폭동 당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한 대형 슈퍼 매장은 직원이 기지를 발휘해 식용유 기름 등을 바닥에 뿌려 약탈자들이 잇따라 나동그라지는 바람에 피해가 덜했다고 한다.

대형슈퍼 체인 체커스의 출입을 관리하는 직원 타비소 틸 패커(21)는 폭동이 다시 일어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또 일어나느냐"고 되물었다.

그 또한 폭동은 나쁘다면서도 주변 친구들은 실직 상태로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서 얼굴이 어두워졌다.

방화와 약탈로 한국 대기업뿐 아니라 교민들이 운영하는 중견업체나 가게들도 큰 피해를 봤다.

[남아공 폭동 1주년 르포] 진원지 더반 평온 속 재발 긴장감
가발업체 아프릭 파이버의 김중엽(36) 팀장은 "당시 주변 마을 사람들이 공장 벽을 무너뜨리고 몰려와 원자재와 가발 등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 공장 한 동이 다 타버렸다"고 그때 상황을 떠올렸다.

실제 공장 담벼락은 새로 막은 곳이 확연히 나머지 벽과 색깔이 달랐다.

약탈을 단순한 생활고 때문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폭도들은 방화를 일삼고 차량 엔진에까지 흙을 넣어 일부러 망가뜨렸다고 한다.

당시 폭동은 재임 시 부패 혐의를 받는 제이콥 주마 전 대통령이 법원 모독죄로 수감된 지 얼마 안 돼 그의 정치적 고향인 더반 등 콰줄루나탈주(州)를 중심으로 지난해 7월 9일 일어났다.

수도권 하우텡까지 번진 약 열흘간의 폭동 와중에 350명 이상이 숨지고 대형마트와 물류창고 등 수천 곳이 약탈당하거나 불탔다.

김 팀장은 "그나마 나중에 우리 공장 흑인 매니저들이 총을 들고 위협 사격을 해 나머지 한 개 공장은 방화로부터 지켜냈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공장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불탄 자리에는 새로운 공장을 세워 1년 만인 지난 7월에야 재입주했다.

이광전 더반 한인회장이 운영하던 앨범 제조공장도 전소됐다.

다른 교민은 시내 중심부에 있는 가게를 지키려다 폭도들에게 신체적 위해까지 당했다.

폭동 후 미담 사례도 있다.

공동체 정신을 발휘한 자원봉사자들이 전쟁터 같은 공단 약탈 현장의 잔해를 다 치우는 데 도움을 주고,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한국과 남아공 현지의 지인들로부터 기부도 잇따랐다고 한다.

하지만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이 '내란'이라고까지 한 폭동 발발 1년이 지나도록 폭동 사주 등으로 제대로 기소된 거물급은 한 명도 없다.

더반을 비롯해 콰줄루나탈주는 올해 4월 이상 기후로 인한 수해까지 겪어 약 5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남아공에서 구직을 포기한 광의의 실업자 비율은 45.5%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남아공은 또 세계에서 가장 소득 불평등이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더반은 아름다운 해변 관광지로도 국내외에 유명하지만, 폭동 1년 후에도 재발의 긴장감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고 있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