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물가상승 속 경기침체) 우려가 잇따르는 가운데,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 같은 경기침체 흐름을 빗겨갈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코로나19 봉쇄 조치가 풀리면서 동남아의 전통적 먹거리인 관광업이 재개된 덕분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의 주요국 정부 자료를 분석한 결과 "동남아 국가들의 총생산량 증가 속도가 물가상승률을 앞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동남아의 6대 주요국 중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의 국내총생산(GDP) 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을 압도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 중앙은행(Fed) 등의 긴축 드라이브로 인해 세계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들 것이란 경고음이 곳곳에서 울리고 있지만, 동남아 국가들은 이 사이클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고 진단했다. 3월 기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베트남 GDP는 전년 동월에 비해 5%가량씩 증가했다.

동기간 2%대를 기록한 물가상승률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3월 GDP 상승폭이 8.3%로 가장 높았던 필리핀의 경우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은 4%에 그쳤다. FT는 "팬데믹(전염병의 대유행) 기간 동안 심각하게 후퇴했던 경기가 반등하는 '기저효과'가 일부 반영됐다"면서도 "수출량 확대 등 동남아는 더 큰 성장 모멘텀을 갖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 세계 스태그플레이션 우려에도 "동남아는 다르다"…왜?
동남아의 경제성장 요인으로는 △역내 관광산업 부활 △개전 이후 식료품·원자재 등의 가격 상승 △글로벌 제조업체들의 탈(脫)중국으로 인한 반사이익 등이 꼽힌다. 최근 전 세계적인 식용유 품귀 사태는 국제 팜유 시장 물량의 90%를 차지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대형 호재로 작용했다. 이외에도 고무(말레이시아, 태국)와 석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대표 수출품목들의 가격이 계속 치솟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지의 제조사들은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생산기지를 중국에서 동남아로 이전하고 있다. 코로나19 발생지역을 완전 봉쇄하는 '제로 코로나' 정책을 장기간 고수하는 중국에서의 기업활동이 어려워졌다는 판단에서다. 이달 초 애플은 중국에 있는 아이패드 생산공장 일부를 베트남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권위주의 성향의 동남아 정부가 물가를 잡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가격 통제 카드를 꺼내들 수 있는 것도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를 낮추는 요인이다. 최근 차기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대선 기간 동안 "곡물값 상한제를 도입해 쌀 가격을 낮추겠다"고 공약했다. 호주뉴질랜드은행(ANZ)의 한 관계자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휘발유 가격을 통제하는 등 동남아에서는 가격 통제 시스템이 가능한 환경"이라면서 "미국이나 유럽 같은 곳에서는 이 같은 돌파구를 쉽사리 선택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프랑스 투자은행 나티시스의 신흥아시아 담당 수석 경제학자는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하는 중국의 지속적인 혼란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의한 지정학적 긴장은 동남아에 대한 투자를 더욱 증가시킬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국계 투자은행 HSBC의 수석 경제학자도 "동남아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관한 비관론보다는 경제재개와 반등에 관한 장밋빛 전망이 우세하다"며 "동남아 국가들의 성장세는 하반기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