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가치가 20년 만의 최저치인 달러당 132엔대로 떨어졌다. 150엔대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제 유가 강세가 이어지면 42년간 이어져온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 행진이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던 엔화와 수출로 버텨온 일본 경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7일 엔화 가치는 장중 달러당 132.99엔까지 하락하며 2002년 2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엔 환율은 전 거래일(963원31전)보다 17원21전 내린 946원10전에 마감했다. 2015년 10월 19일(945원64전) 후 가장 낮다. 원화와 엔화는 시장에서 직접 거래되지 않아 달러화 대비 가치로 산출한 재정 환율로 두 통화의 상대적 가치를 매긴다.

日 '나홀로 저금리'가 부른 엔低…"1弗=150엔대 추락할 수도"
엔저가 이어지는 것은 일본은행(BOJ)이 저물가와 국채이자 부담을 이유로 엔저를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는 전날 “경제를 뒷받침하고 견실한 임금 상승을 유도하기 위해 강도 높은 통화완화 정책을 망설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어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상승하고 소비자들도 물가 인상을 용인하고 있는 만큼 연평균 2% 물가를 달성하기 위해 통화 완화 정책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엔화 약세가 가파르지만 일본 정부도 적극 나서지 않고 있다.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은 이날 “정부가 시급성을 갖고 환율을 모니터링하고 있다”면서도 “무질서한 움직임은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본 당국은 엔저로 기업 투자를 늘리고 수출 기업의 실적 개선을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이후 기업이 임금을 인상하면 자연스럽게 소비가 늘어 물가가 상승해 디플레이션을 막는 선순환을 기대했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의 많은 공장이 해외에 있어 엔저 효과는 반감됐다. 게다가 국제 유가 상승으로 엔저는 일본 내 물가 상승만 부추겨 ‘나쁜 엔저’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이 지난해 7년 만에 최대 규모 무역수지 적자를 낸 데 이어 올해는 42년간 이어온 경상수지 흑자 행진이 막을 내릴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 4월 자체 분석모델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바탕으로 “올해 일본의 경상수지가 원유 가격 급등 여파로 1980년 이후 42년 만에 적자로 전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가와 엔화 환율에 따른 20개 시나리오를 분석한 결과 18개 경우의 수에서 경상적자를 면치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유가가 105달러이고 달러당 엔화가 110엔이면 올해 일본은 22조7000억엔의 무역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됐다. 엔화 가치가 130엔으로 떨어지면 무역적자가 25조4000억엔까지 불어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 국민도 엔화 약세로 인한 원자재값 급등의 충격을 실감하고 있다. 일본 최대 전력 회사인 도쿄전력홀딩스는 지난달 일반 가구용 평균 전기요금을 8505엔(약 8만2830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 올렸다.

하지만 일본이 긴축 정책으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다. 엔화 가치를 방어하려다 자칫 재정을 파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작년 말 일본의 국채 잔액은 처음으로 1000조엔을 넘어섰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이 256%로 미국(133%)과 영국(108%)의 두 배가 넘는다.

도쿄=정영효 특파원/임도원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