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요 산유국들이 세계 시장에 원유를 더 풀기로 했다. 미국 등의 추가 생산 압박에도 꿈쩍 않던 산유국들이 입장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소식에도 유가는 여전히 배럴당 120달러를 넘나들고 있다. 러시아 원유 금수 등 상승 요인이 많아 당분간 국제 유가가 오름세를 이어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입장 바꾼 OPEC+

사우디 등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는 2일(현지시간) 진행한 석유장관 정례회의에서 “오는 7~8월 생산 규모를 하루평균 64만8000배럴 늘리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OPEC+, 美압박에 50% 증산 나섰지만…유가 잡기엔 역부족
하루평균 43만2000배럴이던 기존 증산 규모에 비해 50%가량 추가됐다. 석유장관들은 회의 직후 낸 성명에서 “원유와 정제 제품 모두에서 안정적이고 균형 있는 시장의 중요성이 강조됐다”고 추가 증산 배경을 설명했다.

OPEC+는 2020년 상반기 코로나19에 따른 경기 위축에 대응하기 위해 원유 생산량을 대폭 줄였다. 당시 감산 규모는 하루평균 580만 배럴이었다. 이후 세계 경제가 회복되면서 원유 수요가 다시 늘어나자 작년 8월부터 하루평균 40만 배럴씩 공급을 늘렸다.

하지만 국제 유가는 계속 치솟았다. 경기 회복이 예상보다 빠르고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지정학적 불안 요인까지 더해지면서다. 미국은 시중에 전략 비축유를 방출하고 OPEC+에는 증산을 촉구했지만, 그동안 사우디 등은 ‘찔끔 증산’을 이어왔다.

미 백악관 대변인은 즉각 “사우디가 이번 합의를 위해 큰 역할을 했다”며 환영했다. 스위스쿼트은행의 한 선임 애널리스트는 “추가 증산은 예측하지 못한 진전이었다”며 “그간 증산에 부정적이었던 사우디의 변화는 2년간 얼어붙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신호이기도 하다”고 했다.

화석연료 투자 감소가 근본 원인

하지만 이 같은 소식에도 국제 유가는 소폭 상승했다. 이날 미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원유(WTI)는 1.39% 오른 배럴당 116.87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북해산 브렌트유도 영국 ICE선물거래소에서 1.14% 뛴 배럴당 117.61달러를 기록했다. 증산 합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OPEC+의 산유량 할당 합의에서 제외하는 방안이 빠지면서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산 원유를 금수하기로 한 뒤 시장에서는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수요가 급감했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에 증산 몫을 부담시킨 OPEC+의 결정이 실효성이 없다고 시장이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이날 발표된 미국의 원유 재고가 줄어든 것도 유가 상승을 자극했다. 이는 미국인들이 원유 소비를 예상보다 더 많이 늘리고 있다는 의미다.

CNN 비즈니스는 “국제 유가가 앞으로도 계속 올라 전 세계가 1970~1980년 초반에 겪었던 ‘오일 쇼크’ 이상의 에너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에 의한 일시적인 공급망 교란만이 유가 상승의 이유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기후대응 운동으로 인해 과거 수년간 화석연료 에너지 투자 규모가 급감한 게 큰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국제에너지포럼(IEF)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석유·가스 분야에 대한 투자는 3410억달러(약 424조원)였다. 이는 사상 최고치였던 2014년 7000억달러의 절반 수준에 그치는 규모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5250억달러보다도 23%가량 적다.

프란시스코 블랜치 뱅크오브아메리카 글로벌 원자재 전략가는 “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화석연료 투자를 계속 위축시킨다”며 “이는 가격 변동성을 키우고 공급을 더욱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