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여배우 히로스에 료코를 기용한 NTT도코모의 아이모드 광고(자료 : 회사 홈페이지)
인기 여배우 히로스에 료코를 기용한 NTT도코모의 아이모드 광고(자료 : 회사 홈페이지)
1999년 2월 일본 최대 통신회사 NTT도코모는 세계 최초로 핸드폰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모드'를 내놨다. 아이모드는 세계인의 일상을 바꿔놓은 '스마트폰의 원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앱'이라는 앱 장터에서 앱을 다운로드해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시스템도 아이모드가 처음 선보였다.

핸드폰에 PC의 기능을 결합한 아이모드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06년 1월 가입자수가 4568만명을 넘어서면서 NTT도코모는 세계 최대 무선 인터넷 공급자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NTT, 스마트폰 먼저 내놨지만

'스마트폰의 원조'로 평가받는 NTT도코모의 아이모드 실제 화면(자료 : 회사 홈페이지)
'스마트폰의 원조'로 평가받는 NTT도코모의 아이모드 실제 화면(자료 : 회사 홈페이지)
하지만 아이모드로 세계 통신시장을 장악하려던 NTT도코모의 구상은 실패했다.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도 해외시장 점유율을 확보하지 못한 NTT도코모는 결국 2002년 1조5000억엔(약 15조원)의 손실을 반영한다.

일본인들이 열광한 아이모드가 세계인들에게 외면 받은 이유는 NTT도코모가 지나치게 독자성을 고집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아이모드를 사용하려면 NTT 도메인 등록이 필수였다. 앱도 모두 자체 개발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결국 스마트폰의 시대는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은 2007년에서야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핸드폰에 인터넷 브라우저를 결합하고 앱을 통해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아이폰의 사업모델은 아이모드와 다를게 없었다.

전 세계 이용자들이 함께 서비스를 만들어가는 오픈 플랫폼 전략을 채택했다는 게 차이였다. 애플은 NTT도코모와 같은 인프라 사업자가 아니라 정보기술(IT) 기기 개발회사였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IT업계 전문가들이 "NTT도코모의 전략이 조금만 달랐더라도 아이폰은 등장하지도 못하고, 일본이 오늘날 세계 IT산업을 주도했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이유다. 작년 11월30일 NTT도코모는 아이모드 서비스를 공식 종료했다.

1989년 NTT도코모의 시가총액은 1639억달러(약 207조원)로 세계 1위였다. 현재 NTT도코모의 시가총액은 987억달러로 33년전의 절반 수준이다. 반면 애플의 시가총액은 2조3271억달러로 NTT도코모의 23.5배에 달한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IT 연구개발의 총본산으로 대접받지만 세계 시장에서 NTT도코모의 위상은 초라하다. NTT의 5세대(5G) 이동통신 특허 출원수 비중은 3%에 불과하다.

독자성 고집하다 세계와 동떨어져

'일본은 기술에서 이기고 사업에서 진다.' 일본 재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자조다. 일본 기업들은 기술력을 과신한 나머지 독자성을 고집하다가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지는 '갈라파고스화'를 수십년째 반복하고 있다.

일본 대표 전자회사 소니는 1975년 베타맥스를 내세운 비디오 규격 경쟁, 1992년 MD를 내세운 레코딩 규격 경쟁에서 각각 VHS방식과 CD에 패배했다. 성능과 기술 면에서는 소니의 제품이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도 중시하는 가전시장의 조류를 외면한채 '쓸고퀄(쓸데없이 고퀄러티)'을 고집한 게 패인으로 꼽힌다.

1980~1990년대 세계를 제패한 일본 전자회사들은 2000년대들어 삼성전자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기술력을 맹신한 나머지 PC와 스마트폰 시대의 대응에 뒤처진 탓이라는 분석이다.

일본 경제의 미래를 짊어진 자동차 산업은 하이브리드차, 연료전지차(FCV) 등 자체 기술과 일본의 트랜드를 고집한 결과 전기차 전환에 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1년 일본의 전기차 점유율은 0.6%다. 이 때문에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전기차를 저렴하게 보급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경쟁사들이 고성능 배터리를 탑재해 주행거리를 늘리는 전기차를 개발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지난 20일 닛산자동차와 미쓰비시자동차는 주행거리가 180㎞ 정도로 짧지만 가격을 100만엔 후반대로 낮춘 경전기차를 발표했다. 도요타는 지난 12일 첫 양산형 전기차인 'bZ4X'를 정기구독형 서비스 방식으로 판매한다고 밝혔다.

맥주보다 '맥주맛'이 더 인기인 나라

"아이폰,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것"…기회 걷어찬 일본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잃어버린 30년'의 장기침체로 급여가 30년째 오르지 않는 일본인들은 1엔이라도 싼 제품을 찾는다. 이러한 소비습관에 일본의 기술력이 결합하면서 '갈라파고스 재팬'이 기묘한 형태로 진화하는 경우도 있다. 맥주시장이 대표적이다.

2020년 상반기 맥주맛 알콜음료인 '다이산(第三)'의 시장 점유율(49%)이 처음 맥주(38%)를 제쳐 일본 주류업계를 놀라게 했다. 2004년 시판된 다이산은 일본 주세제도의 허점을 찌른 주류회사들의 신기술이다.

일본은 맥주의 주원료인 맥아의 양에 비례해 세금을 붙인다. 다이산은 맥아를 쓰지 않고 콩과 오렌지껍질 등으로 맥주맛을 낸다. 그 결과 2020년 10월 1차 주세 개정 전까지 맥주의 주세는 77엔이었지만 다이산은 28엔이었다. 350ml 1캔의 소비자 가격은 다이산(127엔)이 맥주(218엔)보다 90엔 쌌다.

일본의 맥주 주세는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다. 과거 일본 정부가 맥주를 고급 수입품으로 간주한 탓이다. 맥주 주세가 2026년 77엔에서 55엔으로 낮아져도 미국의 7배, 독일의 14배다.

일본 맥주회사들이 최신 기술력을 동원해 최대한 맥주맛에 가까운 알콜음료를 최대한 싸게 만드는데 열을 올린 이유다. 글로벌 맥주회사들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프리미엄 맥주 개발에 집중하는 추세와 반대였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의 세제가 일본 맥주의 갈라파고스화를 유도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2026년 10월까지 맥주의 주세는 낮추고 다이산의 주세는 단계적으로 올려 맥주류의 주세를 54.25엔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일본 재무성은 주세 개정의 이유를 "유사상품의 세금차이를 없애 공정성을 높이는 한편 맥주의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