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펜, 민생 이슈 파고들었으나 대권 3수도 실패
흔들린 '공화국 전선'…마크롱, 쉽지 않았던 싸움
[프랑스 대선] 또다시 극우 대통령 거부한 프랑스
프랑스는 이번에도 극우 정치인의 엘리제궁 입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2017년에 이어 두 번째로 중도 성향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결선에서 맞붙은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후보는 24일(현지시간) 다시 한번 고배를 마셨다.

마크롱 대통령에게 등 돌린 유권자를 흡수하면서 5년 전보다 득표율 격차를 좁히기는 했지만, 2012년부터 세 번 연속 도전한 대선에서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로 선택받지 못했다.

선거를 목전에 두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마크롱 대통령이 내치보다는 외치에 신경을 쏟는 사이, 르펜 후보는 서민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을 앞세워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듯했으나 대세를 뒤엎지는 못했다.

에너지 부문에 적용하는 부가가치세를 인하한다거나, 생활필수품에 부과하는 세금을 감면하겠다며 르펜 후보가 내세운 공약을 두고는 재원 조달 방안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유럽연합(EU)과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을 떠나겠다는 과격한 공약은 폐기했지만, 르펜 후보가 제시한 다른 공약을 들여다보면 극우 정체성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중론이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불법 이주민과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을 내쫓는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도록 국민투표를 추진하는 등 이민을 제한하겠다는 구상이 대표적이다.

또 이슬람교를 믿는 여성이 착용하는 히잡을 길거리와 공공장소에서 쓴다면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밝혀 종교를 차별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 대선] 또다시 극우 대통령 거부한 프랑스
연임에 성공한 마크롱 대통령은 다시 한번 프랑스 국민의 신임을 얻은 셈이지만, 그가 받아든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처지란 걸 알 수 있다.

마크롱 대통령과 르펜 후보의 이번 대선 결선 득표율 격차는 15∼16%포인트로 추정되는데, 33%포인트 차이를 보였던 5년 전보다 절반으로 줄어든 수치다.

르펜 후보를 수월하게 뛰어넘었던 2017년과 달리 올해는 극우 세력의 득세를 막으려고 좌우 진영이 힘을 합치는 '공화국 전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1956년 총선을 앞두고 프랑스에 처음 등장한 표현인 '공화국 전선'이 항상 성공하는 전략은 아니었지만, 2002년 대선 때만큼은 그 위력이 대단했었다.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이 연임에 도전하는 선거에서 르펜 후보의 아버지이자 원조 극우의 아이콘인 장마리 르펜 후보가 결선에 '깜짝' 진출하자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는 연대가 결성됐다.

그 덕에 1차 투표에서 득표율이 19.8%에 그쳤던 시라크 전 대통령은 2차 투표에서 82.2%라는 놀라운 득표율을 품에 안고 전례 없는 차이로 압승을 거뒀다.

[프랑스 대선] 또다시 극우 대통령 거부한 프랑스
그랬던 공화국 전선이 약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유권자들이 극우 정치인을 막겠다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배치하는 투표를 하는 데 지쳤을 가능성이 있다.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위기의식을 느껴야 유권자들이 힘을 합치는 것인데,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마크롱 대통령과 르펜 후보의 대결 구도가 피로감을 안겼을 수 있다.

좌파 진영에서 2017년에는 극우 성향의 르펜 후보가 싫어서 마크롱 대통령을 뽑았으나, 임기 중 우파의 색채를 띤 정책에 비중을 둔 마크롱 대통령에게 품는 실망감이 커졌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지난 1차 투표에서 득표율 21.95%로 3위에 오른 극좌 성향의 장뤼크 멜랑숑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대표를 지지한 유권자 사이에서 이런 분위기가 읽혔다.

LFI가 1차 투표가 끝나고 진행한 자체 설문조사 결과 33%만이 결선에서 마크롱 대통령을 뽑겠다고 답했다.

멜랑숑 대표가 5년 전 대선 1차 투표에서 낙선했을 때만 해도 그의 지지자 52%가 결선에서 마크롱 대통령을 지지하겠다고 답했다는 여론조사 결과와 비교된다.

르펜 후보도 싫고, 마크롱 대통령도 싫다는 분위기는 낮은 투표율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론조사기관들은 올해 결선 투표율이 72% 안팎으로 1969년 이후 가장 낮을 것으로 예측했다.

[프랑스 대선] 또다시 극우 대통령 거부한 프랑스
우크라이나 전쟁 한복판 속에서 열린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무게감 있는 이슈로 다뤄졌다.

르펜 후보는 대선을 목전에 두고 전쟁 때문에 외치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마크롱 대통령과 달리 치솟는 물가로 먹고살기 팍팍해진 민심을 파고들었다.

그 덕에 1차 투표 직전까지 마크롱 대통령과 지지율 격차를 한때 2%포인트까지 줄였지만, 종국에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르펜 후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과거 르펜 후보는 러시아가 2014년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영토라고 밝히고, 새로운 세계 질서 구출을 원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동의한다는 발언을 해왔다.

르펜 후보가 2014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본사가 있는 퍼스트 체코 러시아 은행(FCRB)에서 960만유로를 대출받았고, 여전히 채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르펜 후보는 지난 20일 TV 토론에서 그 어떤 프랑스 은행도 RN에 돈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으며 다달이 돈을 갚고 있다고 항변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 정권과 가까운 은행과 이해관계가 얽혀있으면서 어떻게 러시아 앞에서 프랑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르펜 후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는 러시아를 규탄하며 거리를 두는 듯했으나,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와 관계를 회복하겠다고 시사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