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식량,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기초 체력이 약한 신흥국들이 먼저 경제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신흥국의 주요 무역 상대국인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 경고음이 울리고, 각국 통화가치마저 급락하면서 ‘퍼펙트 스톰(초대형 복합 위기)’에 빠졌다는 진단도 나온다. 각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등 정치적 혼란도 거세지고 있다.

사상 최고치 찍은 식량가격지수

살인적 인플레…신흥국 줄줄이 무너진다
최근 신흥국을 가장 위협하는 위기 요인은 식량과 에너지 가격 급등 등 인플레이션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 3월 식량가격지수(FFPI)가 전달보다 12.6% 급등한 159.3을 기록했다고 8일(현지시간) 발표했다. FAO가 FFPI를 집계하기 시작한 1990년 이후 사상 최고치다.

FFPI가 급등한 가장 큰 이유는 우크라이나 사태다.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두 나라에서 많이 생산되는 밀, 옥수수 등 농산물 가격이 급등했다. 지난달 밀 가격이 20%가량 급등하고 다른 곡물 가격까지 덩달아 올라 FAO가 집계하는 곡물가격지수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주로 생산되는 해바라기씨유 가격이 급등하자 식물성기름 가격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제 유가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향방에 따라 요동치고 있다. 지난주 서부텍사스원유(WTI) 선물(5월물 기준)은 배럴당 98.26달러로 마감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30달러를 돌파했던 지난달에 비해 진정세를 보였지만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유럽연합(EU)이 러시아 원유 금수 조치를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위기도 커져

인플레이션 충격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신흥국에서는 연일 혼란이 가중하고 있다. 파키스탄 의회는 10일 임란 칸 총리의 불신임안을 가결했다. 경제 불안, 부패 척결 등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책임을 물었다. 칸 총리가 불신임에 불복하고 있어 파키스탄의 정치적 혼란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외환보유액이 바닥을 드러낸 나라들도 등장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따른 관광객 급감에 이어 인플레이션까지 겹치며 통화 가치(미국 달러 대비 루피화)가 최근 한 달간 40%가량 추락했다. 외환보유액도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 시장에서는 스리랑카가 결국 채무불이행(디폴트)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력난까지 겪는 스리랑카에서는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주식인 밀 확보에 난항을 겪고 있는 레바논도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3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다.

남미에도 비상이 걸렸다. 페루에서는 에너지 가격 상승에 반발한 트럭 운전기사들이 주도하는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며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30년 만에 가장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맞은 칠레에서는 지난달 취임한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 달 만에 하락했다.

위기가 닥치고 있지만 신흥국들은 뾰족한 대응 방안조차 없다는 게 중론이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이미 상당수 신흥국이 기준금리 인상 카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최근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이 공급난이어서 기준금리 조절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와중에 미 중앙은행(Fed)이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과 대차대조표 축소(양적긴축)를 예고해 신흥국들의 자국 통화 가치 방어도 수월하지 않을 전망이다. 중국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주요 도시 봉쇄를 이어가면서 중국의 경기 둔화가 신흥국 경제를 뒤흔들 가능성도 높아졌다.

최근 글로벌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올해 신흥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4.8%에서 4.0%로 낮췄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