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학살자(butcher)’로 지칭하며 러시아의 정권교체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백악관은 러시아 정권교체 의도가 없다고 부인했지만, 미국의 러시아 접근법이 바뀌는 신호탄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러시아는 바이든 대통령의 방문지 인근을 공격하며 “정권교체는 바이든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바이든, 원고에 없는 즉흥 발언

폴란드 간 바이든 "학살자 푸틴 물러나야"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폴란드 바르샤바 왕궁에서 “바라건대 이 사람은 권력을 유지해선 안 된다(For God’s sake, this man cannot remain in power)”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등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 순방길에 오른 뒤 우크라이나 접경지인 폴란드를 방문해 27분간 대중 연설을 했다.

외신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이 원고에 없던 내용으로 러시아의 정권교체를 뜻한다고 해석했다. AP통신은 “바이든 대통령이 푸틴의 퇴진을 촉구했다”고 보도했고, CNN은 “푸틴이 러시아의 지도자가 돼선 안 된다는 선언으로 미국의 러시아 접근법에 중대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푸틴이 권좌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바이든의 즉흥적인 발언은 연설 절정 부분에서 나왔고 바이든 자신도 연설의 힘에 사로잡혀 의도하지 않던 말을 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바이든 대통령 발언에 대해 러시아는 발끈했다. 러시아 크렘린궁의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그건 바이든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며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이 선택한다”고 했다. 이어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부적절하며 미·러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악관은 진화에 나섰다. 백악관 관계자는 “해당 발언의 요지는 푸틴 대통령이 이웃 국가나 지역에 권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의 권력이나 정권교체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러, 바이든 방문지 인근 공격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비판 기조를 이어갔다. 그는 “이 전쟁은 이미 러시아의 전략적 실패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신속하고 가혹한 대가만이 러시아의 진로를 바꿀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푸틴을 향해 “단 1인치도 NATO 영토로 들어온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는 “러시아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푸틴 대통령이 거짓말로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다”며 “지난 30년에 걸쳐 독재 세력이 전 세계에 걸쳐 되살아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또 “푸틴은 이전의 모든 독재자처럼 후안무치하다”며 그를 ‘범죄자’라고 비판했다. 이날 폴란드에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들과 만난 자리에서 ‘푸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학살자”라고 답했다.

러시아는 이날 바이든 대통령 방문지 인근인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를 공격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르비우 동부 외곽지역에 로켓포 두 발을 발사해 최소 5명이 다쳤다. 르비우는 폴란드 국경에서 70㎞ 떨어진 곳이다.

더 타임스는 “러시아 여단장급 지휘관이 하극상을 일으킨 부하가 운전한 탱크에 치여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러시아 지휘관이 탱크에 치였다는 증거는 있지만 사망 여부는 분명치 않다고 전했다.

전날 우크라이나군 총참모부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돈바스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전역을 작전 대상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미 국방부 당국자는 “러시아가 조지아에 있는 병력 일부를 우크라이나로 이동시키는 움직임을 포착했다”고 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