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안전자산' 신화 무너졌다…우크라 침공에도 5년 최저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지정학적 위기가 높아질 때마다 엔화 가치가 오르던 외환시장의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엔화 가치가 5년여 만에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일본은행의 환율 방어선인 '구로다 라인(125엔)'이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왔다.

15일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은 한때 118.45엔까지 올랐다. 엔화 가치가 5년2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한 지난달 24일 이후 엔화 가치는 3.2%(3.71엔) 하락했다. 주요국 통화 가운데 터키 리라 다음으로 낙폭이 컸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엔화는 안전자산으로 대접받아 왔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금융시장 위기 등으로 위험을 회피하려는 투자가들의 심리가 강해지면 어김없이 가치가 올랐다.

◆대외자산 30년째 세계 1위

2001년 9월 미국 '9·11 테러' 직후 엔화 가치는 3.75엔 뛰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는 엔화 환율이 4개월만에 110엔대에서 80엔대로 떨어졌다.(엔화 가치 상승).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80엔대에서 움직이던 엔화 환율이 75.32엔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저 수준까지 하락했다.
달러 당 엔화 환율 추이(자료 : 니혼게이자이신문)
달러 당 엔화 환율 추이(자료 : 니혼게이자이신문)
'안전자산 엔화'의 신화를 만든 주역은 일본을 대표하는 수출 제조업체들이었다. 도요타자동차와 소니 등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팔고 엔화를 샀다. 무역흑자가 쌓이면서 2020년말 일본의 대외순자산은 356조9700억엔(약 3746조5786억원)으로 30년 연속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우에노 다이사쿠 미쓰비시UFJ모건스탠리증권 수석 전략가는 "지정학적 위기로 금융시장이 저조해도 일본의 무역흑자 덕분에 엔화 가치는 계속해서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설명했다.

엔 캐리 트레이드도 '위기 때는 엔화 매수' 공식이 굳어지게 했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이자율이 '제로(0)'인 일본에서 엔화를 빌려 이자율이 높은 해외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거래를 말한다. 안전자산 선호도가 높아지면 엔 캐리 트레이드를 청산하고, 엔화를 매수함으로써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는 주체로 변신했다.

막대한 무역흑자와 엔 캐리 트레이드는 '안전자산 엔화'를 지탱한 양대 축으로 분석된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기존의 공식이 안 통한건 엔화 가치를 지탱하던 양대 축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의 제조업체들은 '엔고(高)'를 피해 해외로 진출했다. 일본의 수출 규모 역시 크게 줄었다. 반대로 동일본대지진 이후 원전 비중을 급격히 줄이기 위해 화력발전 의존도를 대폭 늘린 결과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은 급증했다. 일본 경제가 에너지 가격의 영향을 크게 받는 체질로 변한 것이다.

◆에너지價 영향 받는 체질로 변해

때마침 불어닥친 국제 원자재값 급등으로 무역수지가 적자로 전환하면서 엔화 하락은 더욱 가팔라졌다. 지난 1월 일본의 경상수지는 1조1887억엔 적자였다. 통계비교가 가능한 1985년 이후 2번째로 큰 폭이었다.
일본의 경상수지 추이(자료 : 니혼게이자이신문)
일본의 경상수지 추이(자료 : 니혼게이자이신문)
위기 때마다 엔화를 사들이던 엔 캐리 청산 수요도 예전같지 않았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코로나19의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0 수준까지 낮추면서 엔화의 인기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미국 달러를 빌려 다른 나라 자산에 투자하는 '달러 캐리 트레이드'가 유행했다.

전문가들은 '엔저(低)'가 장기화하면서 또다른 엔화 가치 하락을 유발하는 악순환을 우려했다. 가라카마 다이스케 미즈호은행 수석 시장 이코노미스트는 "상품가격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올랐기 때문에 경상수지 적자가 정착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경상적자가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엔화 가치 하락이 적자폭을 키우는 악순환을 낳는다는 것이다.

달러당 125엔인 구로다 라인이 붕괴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구로다 라인은 외환시장이 일본은행의 최후방어선으로 받아들이는 환율이다. 달러당 엔화 가치가 125엔 수준까지 떨어졌던 2015년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엔저가 더욱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발언해 시장을 안정시킨 이후 생겨났다.

노지 마코토 SMBC닛코증권 수석 전략가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110~120달러 수준을 유지할 경우 경상적자가 굳어지면서 엔화 가치가 125엔~13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은행은 오는 17~18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연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일본은행이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고노 류타로 BNP파리바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설사 일본은행이 정책을 수정하더라도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이 이미 출구전략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엔화 가치 하락을 막는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