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와 게이코 회장과 에리카와 요이치 사장 부부
에리카와 게이코 회장과 에리카와 요이치 사장 부부
퀴즈. 삼국지, 대항해시대, 진삼국무쌍 등 게임을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전설의 명작을 개발한 사람은 누구일까.

1번 전설적인 게임 프로그래머. 2번 공부보다 밴드 활동에 더 열심이었던 경영학도. 3번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의 절친인 전문 투자가. 4번 염료도매회사 사장. 5번 두 딸을 둔 엄마.

정답은 1번을 제외한 모두다. 이 게임들은 고에이테크모홀딩스라는 일본 게임회사가 개발했다. 게임 팬들에게는 'KOEI'라는 영어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고에이는 에리카와 게이코 회장과 에리카와 요이치 사장 부부가 공동으로 경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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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회장이 인정한 전문투자가

고에이는 남편인 에리카와 요이치 사장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도치기현의 염료도매회사의 이름이었다. 요이치 사장은 일본의 사학 명문인 게이오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한 문과생이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보다 밴드 활동에 더 열심이었다. 아내인 게이코 회장은 다마미술대학 디자인과를 졸업한 여성이다. 두 딸의 엄마이기도 하다.

게이코 회장은 일본 최고 부자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과 40년지기 절친이기도 하다. 손 회장을 '손짱'이라고 부르는 몇 안되는 인물이다. 작년에는 소프트뱅크그룹의 사외이사로 영입됐다.

게이코 회장이 1200억엔(약 1조3000억원)의 자금을 굴리는 전문 투자가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판매되는 투자신탁 5300여개 가운데 순자산잔고가 1200억엔 이상인 것은 약 100개에 불과하다. 게이코 회장은 일본에서 상위 1.8% 규모의 초대형 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인 셈이다.

지난해 고에이 순익이 296억엔 가운데 게이코 회장이 투자로 벌어들인 이익이 82억엔에 달한다. 지난 수년간 고에이 순익의 1/3 가량이 투자이익에서 나왔다. 일찌감치 GAFA(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는 물론 테슬라에 거액을 투자했을 정도로 선구안이 뛰어난 투자가다.

문과 출신 남편과 미대 출신 아내가 만나서 어떻게 세계적인 게임회사를 만들었을까. 1970년대말 에리카와 부부가 가업을 물려받았을 때 염료사업은 이미 중국에 밀려난 사양산업이었다. 게이코 회장도 지난 11월16일 한국경제신문과 단독 인터뷰에서 "망할 줄 알았지만 부친이 한이 될까봐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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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은 건 게이코 회장이 요이치 사장의 서른살 생일선물로 마련한 컴퓨터다. 게이코 회장에 따르면 당시 PC는 프린터까지 구비하려면 50만엔의 거금이 들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주식에 투자해서 번 돈과 물려받은 유산을 몽땅 털어서 컴퓨터를 샀다.

요이치 사장은 어릴때부터 혼자 놀기의 귀재였다. 특히 혼자서 자기만의 게임을 만들어서 노는 걸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대학 시절에도 고다쓰(일본식 난방기구)를 뒤집어서 물건들을 늘어놓고 경영하는 게임을 만들곤 했다. 밴드활동에 미쳐서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수학 하나만큼은 잘했다.

그 덕분에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으로 배웠고, 곧 가업을 위한 재고관리 프로그램, 투자를 좋아하는 게이코 회장을 위한 경영게임 등을 만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역시 며칠 밤을 새워가며 몰두한 건 자신이 가지고 놀 게임이었다.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에 손을 댄 건 요이치 사장이 원래 역사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본가인 도치기현 아시카가가 땅만 파면 유적이 나오는 유적지라는 점도 배경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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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요이치 사장이 개발한 일본 전국시대 배경의 카와나카지마합전은 세계 최초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기록된다. 이전까지 게임은 주로 슈팅게임, 액션게임, 스포츠게임이었다. 나카가와지마합전은 고에이를 세계적인 게임회사로 성장하게 만든 신장의 야망, 삼국지 시리즈의 모태다.

요이치 사장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사업으로 키운 건 게이코 회장이었다. 게이코 회장은 방송국, 백화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도매거래의 원리, 재고관리 등 경영의 기초를 꿰고 있었다.

손정의 회장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지금은 세계 최대 벤처캐피털을 운영하는 투자전문회사로 성장했지만 소프트뱅크의 시작은 소프트웨어 도매사업이었다. 소프트뱅크라는 이름도 소프트웨어 뱅크의 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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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회장과의 첫 만남은 악연이었다. 손회장이 도매가 마진율을 17%까지 후려쳤기 때문이다. 게이코 회장은 마진율을 55% 보장해 주지 않으면 거래를 못한다고 버텼고 결국은 손 회장이 두 손을 들었다. 이렇게 교류가 시작된 지 40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절친이 됐다.

게이코 회장은 “나보다 나이가 어려서 귀여운 면도 있다”며 “이상한 일을 벌이거나 능글맞은 짓을 해도 곧바로 알아차린다”고 말했다.

◆별명은 '참치'...70살에도 팔팔한 현역

부부는 올해로 일흔이 됐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요이치 사장은 지금도 직접 게임 개발을 진두지휘한다. 게이코 회장은 투자 뿐 아니라 게임 그래픽, 인사, 사옥 디자인까지 안하는 영역이 없다. 게이코 회장의 별명은 ‘마구로(참치)’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사업이 바빠서 매일 밤 12시에 귀가를 할 때도 주식투자에 시간을 쏟았고 남편과 두 딸의 코트, 스웨터, 치마까지 직접 만들어 입혔다. 게이코 회장은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기도 하지만 옷 만드는게 좋았던 게 더 컸다”고 말했다.

미술관을 연상케 하는 요코하마의 본사 사옥도 게이코 회장의 손길을 거쳤다. 사옥의 카펫부터 액자 하나하나를 직접 골랐고, 테이블 위의 장식이나 액세서리는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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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에이는 게임 캐릭터 모델링, 특히 여성 캐릭터 제작은 경쟁사조차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할 정도로 인정받는다. 경쟁사나 다른 콘텐츠 제작사들이 캐릭터 제작은 고에이에 부탁할 정도다.

캐릭터를 워낙 잘 만드니까 원피스 같은 유명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하는 게임의 제작도 자주 의뢰를 받는다. 이러한 콜라보레이션(협업) 사업이 고에이 주수익원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미대 출신인 게이코 회장이 캐릭터 후보 디자인 한장 한장을 직접 다 챙기기 때문이라고 고에이측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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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에이의 게임들은 또한 배경음악(OST)이 훌륭하기로도 유명하다. 게임 OST를 따로 구입하는 팬들이 있을 정도다. 이 또한 학창시절 밴드활동에 열중했던 요이치 회장이 게임 개발을 진두지휘하기 때문이라는게 일본 게임업계의 분석이다.

고에이는 우량종목만 상장하는 도쿄증시 1부시장 상장사다. 시가총액(약 8000억엔) 기준으로 반다이남코에 이어 일본 2위 게임회사다. 매출 650억엔, 당기순이익 250억엔을 꾸준히 올리는 알짜회사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매년 사상 최대규모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올리고 있다. 올해도 매출 650억엔, 영업이익 245억엔, 당기순이익 265억엔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10년 전까지 고에이는 약점도 많은 게임회사였다. 게임시장의 주류가 모바일과 온라인 게임으로 넘어갔는데 고에이는 PC와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용 콘솔용 게임(패키지 게임)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비중이 절대적인 것도 약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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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에이는 2009년 4월 캡틴 츠바사, 테크모축구, 데드오어라이브 등 액션게임에 강점을 가진 테크모를 합병한다. 현재 회사이름이 고에이테크모홀딩스가 된 배경이다. 게임 업계에서는 전략 시뮬레이션의 고에이, 액션의 테크모 간의 환상적인 결합이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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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과 모바일 게임도 집중적으로 늘렸다. 2018년 2분기 20억엔 수준이었던 온라인 모바일 게임 매출이 올해 2~3분기에는 90억엔씩으로 3년새 4.5배 늘었다. 올 회계연도 상반기 고에이의 게임 부문 매출 352억엔 가운데 온라인 모바일 게임 부문의 매출은 178억엔으로 170억엔인 PC및 콘솔게임 매출과 절반씩이었다.

◆캐릭터 무기로 실적 급성장

고에이는 매년 실적이 최고치를 기록하는 이유가 코로나19 이후의 ‘집콕수요’ 덕분만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회사의 약점이었던 액션게임과 슈팅게임, 온라인모바일 게임을 강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글로벌화와 수익다변화가 결실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실적과 주가 향상도 이제부터라고 회사측은 자신했다.

대표작인 신장의 야망은 1983년, 삼국지는 1985년 처음 출시됐다. 고에이의 대표작이 탄생한 지 35년을 넘으면서 게임 캐릭터가 지적재산권(IP)이 됐다. 요이치 사장은 "게임 캐릭터 하나 키우는데는 적어도 10년이 걸린다. 삼국지 시리즈의 캐릭터는 1985년 처음 출시한 이래 주요 캐릭터의 얼굴 디자인은 거의 바꾸지 않았다. 그게 36년간 쌓이면서 지역과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캐릭터와 지적재산권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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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에이는 이 지적재산권을 활용해 글로벌화와 다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나 초선 같은 여성 캐릭터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액션 게임을 개발하고, 다른 콘텐츠 회사와 협력해 고에이 게임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음악, 식품, 출판 사업을 벌인다.

아예 중국과 한국 게임회사에 라이센스를 팔기도 한다. 2019년 9월 중국 알리바바와 손잡고 '모바일 삼국지 전략판'을 중국 시장에 내놨다. 올초에는 한국과 대만의 스마트폰 게임회사가 고에이의 삼국지 캐릭터를 활용해 '삼국지 패도 전략판'을 선보였다. 라이센스 로열티는 고스란히 고에이의 순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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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고에이의 수익은 신규게임 수익, 시리즈 게임의 수익, 콘텐츠 제작사와의 콜라보레이션 사업 수익, 지적재산권으로 벌어들이는 로열티 수입 등 4층 구조가 됐다. 계속해서 일정한 수익을 낼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탄탄한 사업모델을 바탕으로 요이치 사장은 “2023년까지 매출 900억엔, 영업이익 300억엔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매년 고에이 순익의 1/3을 벌어들이는 투자사업이 보태진다. 손정의 회장이 인정하는 게이코 회장은 18살부터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투자는 숨을 쉬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게이코 회장은 회사 업무 전반을 하나하나 챙기면서도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시황과 경제뉴스를 모조리 확인한다.

게이코 회장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에 의존하는 투자는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고에이는 대형 증권사들의 투자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게이코 회장 은퇴 후에도 투자부문에서 매년 20~30%의 이익률을 낼 수 있는 조직과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

올해로 게임전문 회사로 탄생한 지 40주년을 맞는 고에이. 요이치 사장은 강연회 등에서 자신의 사업철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다하라. 좋아하면 힘을 내게 돼 있다. 자신의 실력으로 승부를 걸어볼 만한 지 냉정하게 판단한 후 일과 취미의 선을 명확히 그을 수 있다면 좋아하는 것을 평생의 일로 삼을 수 있다.기왕 사업을 하려면 성장산업에서 하라. 쇠퇴하는 산업이 아니라 성장하는 산업을 선택해야 의욕이 생긴다. 염료사업에서 게임회사로 업종을 바꿀 때 내가 통감한 사실이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