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쓴다'도 5%..32%는 "팩스 살아남을 것"
"전화는 폐 끼치는 것..팩스가 간편"
"종이에 남은 따스함..어딘가 편지를 닮았다"
2018년 9월 작고한 일본의 대배우 기키 기린이 지인들에게 보내는 팩스 편지로 유명했다. (자료 : 아사히신문)

2018년 9월 작고한 일본의 대배우 기키 기린이 지인들에게 보내는 팩스 편지로 유명했다. (자료 : 아사히신문)

일본 국립국제의료연구센터가 코로나19 사망자 보고서를 처음 발표한 시점은 작년 8월7일이었다. 일본에서 코로나19 환자가 처음 확인된 1월16일로부터 7개월이 걸렸다. 당시 일본보다 사망자가 160배 많았던 미국은 보고서가 나오는데 2개월이 걸렸다.

미국과 일본의 시차를 유력한 차기 일본 총리 후보인 고노 다로 행정개혁상은 인감문화와 팩스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일본에서는 확진자가 나오면 의사는 관할 보건소에, 보건소는 다시 지방자치단체에 팩스로 신고서를 보냈다.

도쿄도가 당일 확진자 수를 발표하는 시간은 오후 3시 전후인데도 팩스 보고 마감시한은 오전 9시였다. 담당 직원들이 31개 관할 보건소에 전화로 19개 항목을 재확인하는 데 6시간이 걸려서다. 사실상 전날밤 통계를 다음날 오후 3시에 발표하는 셈이었다. 후생노동성이 전국 155개 지자체의 감염자 정보를 모두 취합하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이 2개월 걸린 보고서가 일본은 7개월 걸린 이유였다.

디지털화의 물결 속에서도 일본인의 팩스 사랑은 여전하다.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해외 선수들이 아직도 팩스를 쓰는 일본 사회를 보고 놀라워하는 모습도 여러차례 보도됐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다가도 팩스 때문에 출근해야 한다"며 불만스러워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일본에서는 팩스가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남을 것 같다. 아사히신문이 지난 18일 독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32%가 '팩스가 앞으로도 남을 것'이라고 답했다. '사라질 것'이라는 응답(68%)의 절반이지만 상당한 높은 수치다.

응답자의 55%가 '팩스를 쓰고 있다'고 답했다. 사용빈도는 수개월에 1회(38%), 월 1회(24%) 순이었지만 '1주일에 여러 차례'와 '거의 매일 팩스를 쓴다'는 응답도 12%와 5%에 달했다.

팩스의 용도는 '거래처와 업무 관계'가 509명으로 가장 많았다. '가게에 주문을 넣기 위해'가 382명, '행정 및 공공서비스 이용'이 167명이었다. 공적인 업무용도가 대부분이라는 얘기다. 반면 '친구와 안부를 주고받기 위해'와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하는 용도로'도 139명과 100명이었다.

팩스의 장점으로는 의외로 간편함을 꼽는 사람이 많았다. '우편보다 간단하다'가 836명, '써서 바로 보낼 수 있어'가 694명이었다. '인터넷이 연결돼 있지 않아 전자메일을 사용할 수 없어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응답도 675명이었다. '장점을 딱히 꼽을 수는 없지만 뭔가 있다'라는 응답이 244명이었다.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일본인 고유의 정서도 팩스의 생명력을 늘리는 요인이었다. 시즈오카에 사는 49세 여성 독자는 "전화는 상대의 시간을 뺏을까봐 실례라는 생각이 있다. 부담이 없고 종이에 기록이 남는다는 안심감 때문에 팩스를 쓴다"고 말했다.

일본인들도 팩스의 불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팩스를 쓰지 않거나, 쓰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 '이메일로 해결되기 때문'과 '라인 메신저로 해결되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703명과 238명에 달했다.

일본인 55%가 아직도 팩스 쓰는 이유 '디지털 온기'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이바라키현의 59세 여성은 "구청과 동사무소만이 아직도 팩스로 서류제출을 요구하기 때문에 편의점까지 가서 팩스를 보내지만 기계에 정보가 남을까 불안하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팩스를 고집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에는 찾기 힘든 온기 때문이었다. 효고의 69세 여성 독자는 "구카이((句会·하이쿠를 짓는 모임) 때면 자신이 지은 하이쿠를 선생님께 팩스로 보내 회원들이 함께 작품을 감상한다. 모임이 끝나면 달필인 회원이 작품을 정갈하게 써서 팩스로 보내준다"고 말했다.

에히메현의 52세 여성 독자는 "언제가 사라질 지도 모르지만 손글씨가 주는 따스함은 어딘가 편지와 닮았다"고 했다. 2018년 9월 작고한 일본의 대배우 기키 기린은 지인들에게 보내는 팩스 편지로 유명했다. 이를 모아서 펴낸 책도 있다.

도쿄의 67세 여성은 "매년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생일축하 카드를 손으로 직접 그려 팩스로 보냈다. 부모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소중히 갈무리해 둔 손주들의 팩스 축하카드를 보고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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