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CEO) 겸 창업자. 연합뉴스
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CEO) 겸 창업자. 연합뉴스
지난달 7일 점심께(미국 태평양시 기준)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유로2020' 축구대회 준결승이 열렸습니다. 잉글랜드 대표팀 주장 해리 케인이 연장전에서 패널티킥을 성공시키자 제가 있던 실리콘밸리 식당 이곳저곳에서 큰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잉글랜드는 2대1로 승리해 결승전에 진출했습니다. 상기된 표정의 미국인들 모습이 아직 생생합니다.

'한뿌리'라는 생각 때문일까요. 미국인과 영국인은 생각보단 정서적으로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경제와 산업이 얽힌 문제에 대해선 두 나라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사사건건 부딪힙니다. 미국의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인 '엔비디아(NVIDIA)'가 영국을 대표하는 반도체기업 'ARM'을 40조원에 인수(M&A)하려고하자 영국 정부가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는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엔비디아 때문에 테슬라가 ARM과 거래 못한다(?)

언론들도 거들고 있습니다. 영국 언론들은 지난달 20일 현지에서 공정거래위원회 역할을 하는 경쟁시장청(CMA)이 "엔비디아의 ARM 인수는 경쟁의 공정성을 훼손할 것"이라고 밝히고 최장 24주 간 진행되는 심층조사에 들어갔다고 보도했습니다.

CMA가 M&A를 우려하는 논리는 이렇습니다.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하면, 엔비디아가 '경쟁사들이 ARM과 거래하는 걸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뒤에서 설명드리겠지만 ARM은 대부분의 반도체기업들이 거래를 할 수 밖에 없는 설계자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시장의 공정한 경쟁 질서가 훼손된다는 것이죠. CMA는 엔비디아의 경쟁사 핑계도 댑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CMA는 "수많은 ARM의 고객들과 엔비디아의 경쟁자들로부터 합병에 반대하는 자세한 내용과 이유들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CMA의 주장은 27일과 28일 영국의 정론지 텔레그래프의 보도로 이어집니다. 이 신문은 27일 "미국의 전자 상거래업체 아마존과 스마트폰 제조업체 삼성이 미국 경쟁당국(공정거래위원회 역할을 하는 美 법무부 반독점국과 연방거래위원회)에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대한 반대 의사를 제기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루 뒤엔 미국 테슬라의 대표(CEO)인 일론 머스크가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머스크가 반대한 이유는 '반도체업계의 경쟁제한 우려' 때문이라고 합니다. 텔레그래프는 머스크가 언제, 어디서 이 같은 언급을 했는지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쯤되자 실리콘밸리에선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해지고 있습니다

기업 M&A 좌지우지하는 각국 공정거래위원회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지 않으신가요. 왜 사(私)기업 간 M&A에 미국과 영국의 공정거래위원회와 경쟁사들이 '감놔라 배놔라' 하는 걸까요. 왜 이런 소식이 비중있게 보도되는 걸까요.

우리말로 '기업결합심사'라고 불리는 제도 때문입니다. 한국의 공정거래법을 포함해 주요 국가의 경쟁법은 일정한 규모 이상의 회사가 M&A를 하고자 하는 경우 공정위에 신고할 것을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신고 기간 내에 신고하지 않으면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또 공정위는 해당 M&A가 시장의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지를 심사하고, 경쟁제한성이 인정되면 M&A 금지 등 시정조치를 하게 됩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미국기업 A가 미국기업 B를 인수한다고 하면, 미국 공정위에만 신고하면될까요. 답은 '아니다'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A와 B가 한국, 일본, 중국, 영국 등에서 영업을 한다면 한·중·일·영 4개국에 모두 신고하고 심사를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왜 정부가 사기업의 M&A에 대해 관여를 할까요. 기업이 자사가 조달할 수 있는 자금으로 다른 기업을 사는데 말이죠. 경쟁당국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M&A는 △기술혁신, 시장의 변화 등에 전략적으로 대응하고 △규모의 경제 달성으로 비용을 절감시키는 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인위적으로 시장지배력을 획득할 목적'으로 이뤄지기도한다. 시장에서의 경쟁을 제한하는 M&A에 대해선 면밀히 심사·분석해 경쟁제한적 폐해를 효과적으로 시정할 수 있는 시정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M&A 심사는 기업결합 심사는 주
요 경쟁당국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기업결합심사를 통해 경쟁당국은 '승인', '조건부 승인', '불허' 등의 시정조치를 내립니다. 조건부 승인은 예를 들어 "A가 B를 인수하는 것을 허락하지만, B는 향후 5년 간 제품 가격을 올리지 말아라" 등의 조건을 다는 것입니다.

'불허'가 나오면 기업은 M&A를 접어야합니다. 그렇다면 미국과 한국, 영국 등은 승인을 했는데, 중국 경쟁당국이 '불허' 결정을 내리면 어떻게될까요. M&A는 무산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 국가라도 반대하면 안 되는 게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CMA의 동향이 각 국 언론에 대서특필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미국이 찬성해봤자 영국이 반대하면 엔비디아는 ARM 인수를 접어야합니다.

ARM과 엔비디아의 '강력한 시너지'에 떨고 있는 경쟁업체들

그렇다면 각 국 정부와 반도체기업들은 왜 반대할까요. 기업들이 반대하는 이유부터 살펴볼게요. 우선 엔비디아와 ARM이 반도체산업에서 너무나 강력한 기업들이기 때문입니다. 축구 이야기로 시작한김에 비유를 해보면, ARM은 잉글랜드축구협회(FA), 엔비디아는 맨체스터시티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맨시티가 FA를 아예 인수한다고하니, 나머지 팀들이 "축구협회가 잉글랜드 프로축구의 모든 제도를 맨시티에 유리하게 바꿀 것"이라고 걱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 반도체업체 ARM 로고. 홈페이지 캡처
영국 반도체업체 ARM 로고. 홈페이지 캡처
우선 영국 ARM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ARM을 반도체 설계자산(IP)기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림에 비유하자면 완성된 작품을 반도체라고하면 ARM은 '밑그림'(설계)을 그려주는 업체입니다. 그리고 밑그림을 잘 그리는 업체는 ARM 밖에 없습니다. 퀄컴, 삼성전자, 애플 같은 기업들은 ARM에서 밑그림을 받아 각자 개성을 발휘해 물감을 칠하고 그림을 완성시키는거죠. 대신 반도체기업들은 ARM에 일정 수준의 댓가(로열티)를 지급합니다. ARM이 밑그림을 제공하지 않으면 반도체기업들은 제품 생산에 애를 먹습니다. 어떻게 보면 ARM은 '공유재' 비슷했던거죠.

이런 상황에서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한다고하니 다른 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습니다. 퀄컴, 삼성전자 같은 기업들은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하고 △ARM과 경쟁사들의 거래를 막아 △경쟁사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엔비디아와 ARM이 "그럴 일은 없다"고 항변해도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두번째로는 엔비디아의 기술력이 더욱 강력해지고 사업범위가 확장하는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사실 경쟁사들이 걱정하는 건 'ARM과 거래를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도 크지 않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진짜 걱정은 엔비디아의 힘이 더 세지는 것이죠.

엔비디아는 GPU(그래픽프로세서유닛) 세계 1위 기업입니다. 최근 AI 반도체로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반도체 시가총액 세계 2위에 오를 정도로 성장성을 인정 받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의 약점, 아니 엔비디아가 좀처럼 넘보지 못했던 분야가 반도체의 '두뇌' 역할을 하는 CPU(중앙처리장치)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등과 관련된 시장입니다.
엔비디아의 자율주행 테스트카. 연합뉴스
엔비디아의 자율주행 테스트카. 연합뉴스
향후 자율주행차 등의 보급이 확산하면 '두뇌' 역할을 하는 프로세서의 중요성으 더욱 커질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ARM은 CPU나 AP의 설계 능력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함으로써 '날개'를 달게 되는 것입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 겸 대표(CEO)가 무려 40조원을 ARM에 베팅한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자, 퀄컴 삼성 뿐만 아니라 반도체 시장 진출을 노리거나 진출한 구글, 테슬라, 아마존 등이 눈에 불을 켜고 '반대' 의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첨단산업 잃는 것이 두려운 영국

국가 차원의 문제도 살펴드리겠습니다. 영국 CMA가 민감하게 나오는 것은 영국의 자존심 때문이란 분석이 많습니다. 영국은 내세울만한 첨단산업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나마 ARM을 통해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ARM이 경쟁국인 미국업체, 그것도 대만계 미국인이 창업자이고 역사도 비교적 짧은 엔비디아에 넘어간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 나옵니다.
관공서가 모여 있는 런던 다우닝가. 연합뉴스
관공서가 모여 있는 런던 다우닝가. 연합뉴스
여기에 미국과 영국은 과거에도 경쟁당국을 통해 각 국의 핵심기업에 대해 펀치를 주고 받을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예컨데 3~4년 전 영국을 포함한 EU 국가들은 미국의 구글, 애플, 아마존 같은 테크기업들에 대해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즉 '독점의 횡포'를 통해 소비자 이익을 낮추고 시장의 경쟁을 제한한다면서 수조원대 과징금을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자국기업에 대한 유럽의 견제"라며 이를 갈았습니다. 곧 미국 경쟁당국은 유럽의 자동차업체와 제약사들에게 비슷한 혐의로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도했죠.

이런 상황에서 영국 정부와 언론이 마치 짠듯이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을 만드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가능할까요. 저는 엔비디아의 ARM 인수는 승인돼야한다고 봅니다. 물론 "ARM이 엔비디아와 경쟁사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하지 않아야한다"는 등의 '조건'이 필요할 것입니다.

정치논리에 휘둘리는 M&A...결국 부메랑 될 수도

'인수 불허'는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경쟁법 전문가나 경쟁당국 공무원처럼 전문성은 높지 않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ARM은 시장에서 직접 뛰는 '선수'는 아니기 때문에 경쟁이 제한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겁니다.

게다가 무려 40조원을 ARM에 베팅한 엔비디아의 전략적인 판단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40조원은 엔비디아 1년 매출인 약 13조원의 3배에 달하는 돈입니다. 이런 거금을 베팅했다는 건 명운을 걸었다는 겁니다. '위험요인(리스크)'을 감수하고도 '한 번 해보자'는 전략적 판단이 개입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기업들이 대형 M&A에 주저하는 사이 엔비디아는 '야성적 판단'을 내린 거죠.

이런 경영전략이 '정치적인 이유'로 막히는 것은 향후 경쟁기업에도 '부메랑'이 돼 돌아오지 않을까요. 지금 같은 복마전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세계 어떤 반도체기업이 M&A를 성공리에 마무리지을 수 있을까요. 물론 냉혹한 기업 간의 경쟁 시장에서 '도의'를 논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지만, 시장에선 정치논리로 훼손되면 안되는 '원칙'이 필요하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경쟁자 입장에선 걱정되는 일인게 맞지만, 시장 경쟁의 원칙에선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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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황정수 특파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