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이 암호화폐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면 경제적 안정성이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 달 뒤 법정화폐로 비트코인으로 도입키로 한 엘살바도르 정부를 겨냥한 것이다. 자국 통화가 제 기능을 못하는 중남미 지역에선 암호화폐를 안전자산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IMF, 암호화폐 법정통화 도입 우려

3일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IMF는 지난달 말 공식 블로그를 통해 법정화폐로 암호화폐를 사용하기 위해선 아직 많은 단계가 남았다는 글을 올렸다. 일부 국가에서 암호화폐를 화폐로 지정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지만 이를 도입하면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이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변동성이 큰 암호화폐 때문에 물가가 불안정해지고 재정 건전성도 훼손될 수 있다. 암호화폐는 자금 세탁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없어 테러 자금 지원, 탈세 등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어서다.

엘살바도르는 다음달 7일 정부 법정화폐로 비트코인을 도입할 계획이다.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은 입장문을 통해 "비트코인 도입은 2001년 엘살바도르가 미국 달러를 채택한 것처럼 법정화폐를 선택할 수 있는 주권을 행사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2001년에는 은행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었지만 이번에는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부켈레 대통령은 달러를 법정화폐로 사용하면서 엘살바도르의 투자 잠재력이 향상됐지만 미국 연방은행(Fed)에 대한 의존도도 그만큼 높아졌다고 했다.

코로나19 회복을 위해 미국은 유례없이 많은 양의 달러를 찍어내 미국 경기를 부양했지만 이에 대한 혜택이 엘살바도르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엘살바도르에선 달러 가치가 떨어져 역효과만 내고 있다. 비트코인을 새로운 법정화폐로 지정하게 된 배경이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달러를 법정통화로 채택한 뒤 금융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암호화폐에 원활히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엘살바도르에서 전통적인 금융서비스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인구의 70%에 이른다. 화산의 지열을 이용해 비트코인을 채굴하는 방안도 논의중이다. 전자지갑 '치보'를 출시하고 이를 개설하는 국민들에게는 30달러 규모의 비트코인을 제공할 계획이다.

경제 무너진 중남미서 암호화폐 '안전자산' 주장도

엘살바도르가 통화정책을 변경하면 당장 IMF 등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IMF로부터 10억 달러를 빌리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하기 위한 법안이 통과된 뒤 엘살바도르 채권 가격도 하락했다. GDP 대비 부채 비율이 89%인 엘살바도르는 올해 20억 달러의 부채를 상환해야 한다.

기업과 국민들의 불안도 커지고 있다. 엘살바도르 상공회의소 설문 결과 응답자의 90% 이상이 결제수단으로 비트코인을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다수가 달러화를 계속 쓰겠다고 답했다. 비트코인을 통화수단으로 사용하면 국민의 44%는 경제가 악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중남미의 악화된 경제 상황 때문에 대안을 찾아 나설수 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남미 지역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무너지고 초인플레이션이 이어지면서 재정위기는 심각한 상태다.

아르헨티나는 과도한 부채부담으로 모라토리엄(채무 불이행) 위협과 싸우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 규모는 2013년 이후 75% 정도 줄어들었다. 베네수엘라 화폐의 공식 환율은 1달러에 330만 볼리바레인데 암시장에서는 수십억 볼리바레에 거래된다. 매년 물가상승률이 2600%를 넘는다. 달러 가치로 평가되던 자산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본 이들은 비트코인을 더 안전한 자산으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비트코인 채굴회사 비트팜의 에밀리아노 그로즈키 CEO는 "우리는 미래 경제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며 "새로운 생태계에서 우리는 중앙은행을 대체하는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그로즈키는 과도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뒤 캐나다 토론토에서 비트팜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