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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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대형 투자은행이 직원들의 사무실 복귀를 밀어붙이고 있다. 월가의 상징 '돌진하는 황소'와 같은 기세다. 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산도 이런 흐름을 막지 못하고 있다. 주요 미국 기업들이 출근 시점을 연기하는 행보와는 대조적이다.

투자은행이 '정상 출근'을 고수하는 배경은 대면 영업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에 있다. 신규 고객 확보 등 고객 관리를 위해서는 면대면 영업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업무 적응이 필요한 일부 인턴들은 출근 지침을 환영하지만 반발하는 목소리도 크다. 투자은행의 '출근 모드'가 다른 기업들의 재택근무 흐름에 역행하다보니 인재 이탈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월가에 위치한 황소상/사진=AP연합뉴스
월가에 위치한 황소상/사진=AP연합뉴스

투자은행, 일제히 "출근하라"

블룸버그통신은 29일(현지시간)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백신 접종자도 실내에서 마스크를 착용해야한다고 권고한 후 월가 투자은행들은 출근과 관련한 어떤 정책 변경도 발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골드만삭스와 JP모건은 백신 2차 접종까지 완료한 직원들은 실내에서 마스크를 착용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1~2개월 전부터 출근하기 시작한 직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앞서 골드만삭스는 6월부터, JP모건은 7월초부터 직원들을 회사로 출근시키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자사 직원들에게 백신 접종을 권고했다. '미국 노동절(9월 6일)까지 출근하라'는 지침은 거둬들이지 않았다. 사실상 백신을 맞고 사무실로 돌아오라는 주문이다. 비교적 유연한 출근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씨티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씨티그룹 인턴 550여명은 7월 말부터 출근하고 있다.

이외에도 미국 보험사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AIG)이 직원들의 공식 출근일을 9월 14일로 못 박았다. 코로나19 확산세 속에서 월가의 금융업계가 재택근무 중단 실험에 나선 셈이다. 변이 바이러스에는 백신 효과가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재택근무 중심으론 회사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코로나와의 공존'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CEO/사진=한국경제DB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CEO/사진=한국경제DB

재택 중인 실리콘밸리로 이탈하나

'직원들을 하루빨리 복귀시키겠다'는 투자은행 수장들의 의지는 누구보다 강하다. 제임스 고먼 모건스탠리 최고경영자(CEO)는 "뉴욕에 위치한 레스토랑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사무실에도 출근할 수 있다는 뜻"이라며 "직원들이 출근하길 바란다"고 했다. 백신 접종을 계기로 적극적인 영업 활동에 나서라고 말하는 리더도 있다.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CEO는 "백신을 맞았다면 비행기를 타고 고객들을 만나러 가라"고 했다.

투자은행 CEO들이 이토록 정상 출근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대면 비즈니스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여기에는 화상 회의 등 비대면 만남을 통해선 얼굴을 직접 맞대는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유·무형적 성과를 창출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다. 아울러 CEO들은 대규모 거래가 매일같이 이뤄지는 업의 특성상 대면 만남을 통해 사이버 보안을 철저히 지켜야한다는 입장이다. JP모건은 지난해 연례 보고서에서 "직원 상당수가 원격 근무에 돌입해 화상회의 플랫폼의 사용이 증가하면서 사이버 공격에 대한 노출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CNN은 "은행 업무의 핵심은 대면 사업"이라며 "경쟁이 치열한 월가의 어느 누구도 느린 와이파이 연결 때문에 거래를 잃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상 출근에 대한 투자은행의 '집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재택근무의 맛'을 본 직원들이 회사 복귀 시점을 전격 연기한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업체)로 대거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CNN은 "월가 투자은행이 출근 재개를 향해 너무 공격적으로 움직이면 실리콘밸리와 같이 경쟁력 있는 산업에 인재를 뺏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애플, 구글 등 미국 대형 IT기업은 출근 시점을 10월로 한 달 연기했다. 애플의 경우 10월 이후에도 재택근무와 출근을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근무 방식'을 채택할 방침이다. 실리콘밸리의 이같은 유연성은 근로 여건을 점차 중시하고 있는 투자은행 직원들의 이탈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직원들이 더 유연한 회사로 이동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면 향후 10년간 월가 투자은행의 근무 방식이 변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마스크를 쓴 시민이 월가를 걷고 있다./사진=로이터
지난해 마스크를 쓴 시민이 월가를 걷고 있다./사진=로이터

출근 반기는 직원도

출근 재개에 대한 투자은행 직원들의 반응은 각기 다르다. 인턴, 정규직 직원 등 처한 상황에 따라, 연차에 따라서도 입장이 제각각이다. 최근 여름 인턴십을 시작한 한 골드만삭스 예비 애널리스트는 블룸버그통신에 "이메일, 화상회의가 아니라 회사에 출근해 팀 선배들과 얼굴을 맞대고 관계를 맺는 것이 정말 흥미롭다"고 말했다. JP모건의 인턴도 "프로젝트에 대해 질문하고 싶을 때 바로 뒤에 앉은 직속 상사에게 물어볼 수 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반면 저연차 직원들은 반발이 심하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CNN에 "많은 애널리스트들과 저연차 직원들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서두르지 않는다"면서 "도시 외곽에 사는 사람들은 회사로 돌아오려는 욕구가 전혀 없다"고 했다. 돌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직원들도 사무실 복귀 방침이 달갑지 않다. 헤지펀드 운용사 스카이브리지캐피털의 한 직원은 "중급 경영진이나 어린 자녀가 집에 있는 직원들은 보육 환경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면 출근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은행권이 최근 호실적을 거둔 것도 출근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대목이다. JP모건은 2분기 119억5000만달러(약 13조7000억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46억9000만달러에서 2.5배 이상 급증한 규모다. 골드만삭스도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주요 투자은행들이 기록적인 실적을 올리면서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직원들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여러 논란 속에서 투자은행들이 재택근무로 재전환할지는 미지수다. 그간 투자은행 CEO들이 강력하게 사무실 출근을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산세가 더욱 심각해질 경우 투자은행도 결국 회사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