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동맹국들과 디지털무역협정 체결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이후 아·태 지역에서의 무역 주도권 약화를 만회하는 동시에 떠오르는 디지털산업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 아·태 지역 동맹국들과 디지털무역협정 체결을 검토 중이라고 소식통을 인용해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또 캐서린 타이 미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아·태 지역 8개국 통상장관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다고 전했다.

미국이 협상 대상국을 공개하진 않았지만 아·태 지역 동맹국인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캐나다 등이 주요 대상국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디지털 무역협정은 인터넷을 통한 상품·서비스·데이터 교역 규정, 국가 간 정보 이동, 디지털 개인정보 보호, 인공지능(AI) 사용 규범 등에 관한 협정이다. 지난해 싱가포르 칠레 뉴질랜드 3개국이 세계 최초의 디지털무역협정인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EPA)을 맺었고 한국과 캐나다도 가입을 고려 중이다.

웬디 커틀러 전 USTR 부대표는 “미국이 DEPA를 (아·태 지역 디지털무역협정 체결의) 출발점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美 "中 견제, 디지털 동맹에 달려"
中 주도하는 RCEP 속도내자…디지털 산업 주도권 선점나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동맹국과의 디지털 무역협정 체결을 검토하는 것은 패권 경쟁을 벌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란 분석이다. 현재 미국은 경제적·전략적으로 중요한 ‘아·태 지역 무역 게임’에서 중국에 주도권을 내준 상태다. 중국은 지난해 11월 아·태 지역 15개국이 참여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출범으로 이 지역에서 경제적 영향력을 배가했다. RCEP은 2019년 기준 세계 인구와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30%, 세계 무역의 28.7%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이다.

반면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빠지면서 RCEP의 ‘대항마’를 잃었다. TPP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아·태 지역에서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극 추진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탈퇴했다. 이후 일본 캐나다 등 11개국이 미국이 빠진 상태에서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CPTPP 회원국은 미국의 재가입을 원하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지지층인 노조 등의 반발을 우려해 복귀에 소극적이다.

바이든 행정부 내에선 미국 주도의 무역동맹 부재가 중국과의 경쟁에서 불리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아시아정책을 총괄하는 커트 캠벨 백악관 인도·태평양 조정관은 최근 한 싱크탱크 행사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긍정적인 무역 아젠다 없이는 (미국의 중국 견제가)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아·태 지역 동맹국들이 참여하는 디지털 무역협정을 주목하는 이유다.

영향력이 커진 디지털산업에서 미국이 중국을 제치고 주도권을 쥐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이 디지털 무역협정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데 대해 “바이든 행정부가 첨단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수출 통제 같은 이슈에 접근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 협정은 방해받지 않는 국가 간 정보 흐름으로 이익을 볼 수 있는 아마존 구글 등 (미국의) 빅테크들에 요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아시아 국가들과 다자협정을 맺는 것에 대해 바이든 행정부 내에서 ‘온도차’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과 국무부는 미국의 리더십 확대를 위해 협정 체결에 적극적이지만, 무역대표부(USTR)는 미국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우선해 협정에 신중한 편인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