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중간선거 앞두고 9개월간 후보 36명 등 정치인 91명 피살
카르텔 등이 이권 위해 공격…방탄조끼 입고 유세하는 후보들
[특파원 시선] 올해도 피로 얼룩…멕시코 선거 잔혹사는 왜 반복되나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소도시 시장직에 출마한 레네 토바르는 선거를 이틀 앞둔 4일(현지시간) 밤 자택에서 살해됐다.

무장괴한들이 귀가하던 토바르를 납치하려다 그가 저항하자 최소 8발의 총을 쏜 후 달아났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면 몇 날 며칠 언론을 달굴 사건이지만, 멕시코에선 그다지 큰 뉴스는 아니었다.

6일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지난 9개월간 살해된 정치인이 그를 빼고도 90명이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연방 하원의원과 주지사, 시장, 지방의회 의원 등 총 2만여 명을 뽑는 이번 선거는 후보 숫자 등에서 멕시코 역대 최대 규모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이기도 하다.

꽤 중요한 선거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멕시코 밖 나라들 언론에 나온 이번 선거 기사는 살해된 정치인들의 이야기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선거를 앞두고 후보 여러 명이 무참히 살해되는 것, 멕시코 등 일부 중남미 국가에선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은 일이지만, 멕시코 밖에선 여전히 믿기 힘든 일이다.

멕시코 컨설팅업체 에텔렉트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사실상 선거 기간이 시작된 지난해 9월 초부터 지난달 말까지 정치인들에게 가해진 범죄는 총 782건이다.

살해 협박과 살해, 상해, 납치나 감금, 가족 등에 대한 공격, 재물손괴 등을 모두 포함한 수치로, 2018년 선거 때의 774건보다도 늘어났다.

2000년 이후 치러진 선거 중 가장 폭력으로 물든 선거라고 에텔렉트는 전한다.

[특파원 시선] 올해도 피로 얼룩…멕시코 선거 잔혹사는 왜 반복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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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잃은 정치인이 모두 91명, 이중 토바르를 포함한 36명이 후보 또는 예비후보였다.

평범한 시민도 아니고 정치인들이 살해돼도 용의자가 붙잡혀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다.

체포한 용의자가 청부살해범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잘 알려진 정치인들을 상대로 대담한 범행을 저지르는 이들은 누구일까.

누구나 짐작하듯이 마약 카르텔 등 범죄조직의 소행인 경우가 많다.

범죄조직이 안정적으로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시장 등 고위층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정치인들이 지역 범죄조직의 상납 장부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드물지 않다.

카르텔의 활동이 활발한 지방일수록 더욱 그렇다.

정치 전문가 기예르모 트레호는 최근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범죄조직들은 마약밀매 루트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다툼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지방 정부와 지역 경제, 주민, 영토를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고 말했다.

이러한 범죄조직들이 선거철이 오면 자신들에게 최대한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정치인을 당선시키기 위해 경쟁 후보에게 위협을 가한다.

범죄조직과 손잡길 거부하는 후보 또는 경쟁조직과 손잡은 후보도 보복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미국 마약단속국(DEA)이 수배 중인 인물이 버젓이 출마한 경우도 있으니 정치인이 곧 범죄인인 경우도 물론 있다.

[특파원 시선] 올해도 피로 얼룩…멕시코 선거 잔혹사는 왜 반복되나
결국 청렴한 정치인이든 부패한 정치인이든 위험에 내몰리긴 마찬가지고, 카르텔 영향력이 센 지역일수록 정치인이라는 직업은 사명감만으론 하기 힘든 일이 된다.

에텔렉트에 따르면 살해된 후보 35명 중 30명이 시장과 지방의회 후보 등 기초지자체 단위의 후보였다.

여당보다는 야당 정치인에게 공격이 가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협박에 못 이겨 중도 포기한 후보들도 18명 있었다.

카르텔들의 세력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을 피하는 일도 어렵지 않기 때문에 선거 무렵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은 너무 힘든 과제라 일단 조심하는 게 최선이다.

미초아칸주의 시장 후보로 나선 기예르모 발렌시아도 지난달 괴한의 총격을 받은 후 더욱 긴장 상태로 선거운동을 펼쳤다.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방탄조끼까지 입지만 그는 "어느 날 누군가가 웃으며 다가와 포옹을 한 뒤 총을 꺼내 나를 쏠지도 모를 일이다.

돈만 주면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AP통신에 말했다.

범죄조직의 힘이 이미 공권력을 넘어선 일부 지역의 정치인은 어쩌면 가능한 한 가장 강력한 범죄조직과 손을 잡고, 임기 내내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영화 '시카리오'나 TV 시리즈 '나르코스' 등에서 그려지는 무법천지 멕시코의 모습은 결코 멕시코의 전부가 아니지만, 피로 물든 선거의 뉴스를 볼 때마다 영화와 현실이 그리 멀리 있진 않음을 새삼 느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