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의 대표적 정착지 '푸칠로프카'…학교에 전시관 조성해
학교 관계자 "마을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해야"

[※ 편집자 주 : '에따블라디'(Это Влади/Это Владивосток)는 러시아어로 '이것이 블라디(블라디보스토크)'라는 뜻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특파원이 러시아 극동의 자연과 역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생생한 소식을 전하는 연재코너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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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차를 타고 러시아 연해주(州)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을 벗어나 북쪽으로 2시간 30분가량을 내달려 도착한 조그마한 시골 마을. 인구가 500명을 조금 웃도는 우수리스크 지역의 푸칠로프카(육성촌·六城村)다.

[에따블라디] 고려인은 떠났지만 맷돌·묘비 곳곳에 남아


이 마을은 러시아 고려인(옛 소련권 토착 한인) 이민 역사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한인 정착지다.

1869년 마을이 조성됐다.

당시 니콜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에서 가장 부유하면서도 러시아화 된 지역이었다.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가 이뤄지면서 마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잃었다.

고려인들은 떠났지만, 그들의 흔적은 여전히 마을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남아있었다.

마을 중심부 학교(쉬콜라) 건물 뒷마당만 가봐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마당에는 고려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맷돌들이 곳곳에 널려있었다.

[에따블라디] 고려인은 떠났지만 맷돌·묘비 곳곳에 남아

이 학교의 건물 2층에는 고려인들과 마을과의 인연을 설명하는 작은 전시관이 있다.

2007년에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20㎡ 규모의 전시관에는 고려인과 관련한 각종 사진과 서적 등 200개 정도의 전시물이 보관돼있다.

특히 1874년 발간된 최초의 우리말 대역사전인 '노한사전'을 펴낸 러시아 군인 미하일 이바노비치 푸칠로(1845~1889)에 대한 자료가 눈길을 끌었다.

[에따블라디] 고려인은 떠났지만 맷돌·묘비 곳곳에 남아

이 마을의 이름도 푸칠로에서 따온 것이다.

지방관리로 파견된 젊은 군인 푸칠로는 궁핍 등을 피해 이주한 한인들의 연해주 정착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를 위해선 원활한 의사소통이 필수적이었다.

결국, 그는 한인들의 말을 체계적으로 조사, 745쪽에 달하는 노한사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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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 출신의 포석(抱石) 조명희(1894∼1938)도 푸칠로프카 마을과 인연이 깊다.

그는 일제 수탈의 실상과 한인의 저항을 묘사한 소설 '낙동강' 등을 집필해 한국에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평가받고 있다.

조명희는 1928년 망명 후 이 마을에 세워진 육성촌 농민청년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에따블라디] 고려인은 떠났지만 맷돌·묘비 곳곳에 남아

그는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농민청년학교 건물은 전시관이 있는 학교 맞은편에 보존돼있다.

푸칠로프카의 학교 전시관을 관리하는 파브페르타바 발렌티나(62)는 "과거에 한국인이 이 건물을 구매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설명했다.

건물 주변에는 현재 출입을 막는 담장이 쳐져 있어 내부를 살펴볼 수는 없었다.

[에따블라디] 고려인은 떠났지만 맷돌·묘비 곳곳에 남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고려인들의 묘비들은 이곳이 과거 고려인 마을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또 다른 역사의 흔적이다.

[에따블라디] 고려인은 떠났지만 맷돌·묘비 곳곳에 남아

파브페르타바 발렌티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에는 주로 한국인들이 전시관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해야 한다"면서 작은 전시관이지만 주민들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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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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