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7일 이란 수도 테헤란 인근의 한 마을. ‘이란 핵 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던 모센 파크리자데가 방탄차를 타고 부인과 함께 휴양지 아브사르드로 향하고 있었다. 무장 경호 차량 3대가 앞뒤에서 호위했다. 차량 행렬이 회전식 교차로에 진입하는 순간 150m 거리에 있던 한 픽업트럭에서 총탄이 날아들었다.

파크리자데는 급하게 차량 밖으로 나왔지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총탄을 피할 순 없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뒤 그는 곧바로 숨을 거뒀고, 함께 있던 경호원 두 명도 사망했다. 픽업트럭에 설치된 기관총은 무인 원격 조종으로 작동했고, 총격을 끝낸 뒤 차량은 자폭 장치로 폭파됐다. 불과 3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란 정부는 이 사건의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했다.

중동의 앙숙 이스라엘과 이란이 40년간 이어온 ‘그림자 전쟁’의 한 장면이다. 그림자 전쟁은 정규 군사력을 동원한 직접적 전쟁 대신 비밀스럽게 적국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사이버 테러, 핵 과학자 등 요인 암살, 주요 시설 드론 공격 등의 방식으로 이뤄진다.
최악 치닫는 이스라엘-이란 '그림자 전쟁'

○이란 핵시설 폭발로 긴장 고조

이스라엘과 이란의 싸움은 올 들어 위험한 수위까지 올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BBC방송은 “두 나라는 서로에게 엄청난 파괴력을 줄 수 있는 전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은밀한 전쟁을 해왔다”며 “하지만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복원 문제를 두고 싸움이 격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11일 이란 중부 나탄즈에 있는 우라늄 농축시설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가 ‘기폭제’였다. 이란 당국에 따르면 핵시설 내 전기 공급이 끊기고 화재가 발생하면서 원심분리기가 손상됐다. 나탄즈 핵시설은 이란 핵합의에 따라 사용이 금지된 개량형 원심분리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란 정부는 “침입자들이 주 전력망과 예비 배터리를 동시에 끊었고, 갑자기 전력이 끊기자 원심분리기의 회전이 통제되지 않아 수천 기가 파괴됐다”고 밝혔다. 이란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벌인 일로 추정했다. 사이드 카티브자데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이번 사건은 명백한 사보타주(고의적 파괴)”라며 “시온주의 정권(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곧바로 이란의 반격이 시작됐다. 지난 13일 이스라엘 상선 하이페리온 레이호는 페르시아만에서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이스라엘 언론 채널12는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이번 선박 공격은 이란의 소행”이라고 보도했다.

이란은 하루 뒤인 지난 14일에는 나탄즈 핵시설의 우라늄 농축 농도를 기존 20%에서 60%로 끌어올린다고 발표했다. 핵무기 제작에 필요한 우라늄 농도 90%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2015년 국제사회와 맺은 핵합의에 위배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란이 나탄즈 핵연료농축시설(PFEP)에서 농도 60% 육불화우라늄(UF6)을 생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고 확인했다.

UF6는 천연 우라늄으로부터 생산한 고체 상태 우라늄을 기체로 만든 화합물이다. 핵무기 원료로 사용하는 우라늄-235 원자를 분리하기 위해 원심분리기에 주입하는 물질이다. 로이터통신은 최근 IAEA 보고서를 입수해 “이란이 나탄즈 핵시설 지하에 개량형 원심분리기를 추가로 설치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전했다.

○1979년 이란혁명 이후 ‘앙숙’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시설 변화에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나라다. 이란이 비밀리에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어서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최근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이란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표현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중동에서 이란의 광신적 정권만큼 위험한 것은 없고, 그들은 핵무기를 포기한 적이 없다”며 “직면한 위협에 대처하는 데 미국과 이스라엘의 협조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악연은 1979년 이란혁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란에 반미 시아파 정권이 수립된 뒤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이후 이스라엘은 이란이 본격적으로 핵 개발에 나서자 이를 막기 위한 은밀한 공격을 이어왔다.

2010년 나탄즈 핵시설의 원심분리기 등이 ‘스턱스넷’이라는 웜바이러스를 이용한 사이버 해킹 공격으로 무력화된 것도 이스라엘의 공격 때문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암살 공작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사망하거나 죽은 이란의 핵 과학자 등은 7명에 달한다.

최근에도 이란 주변에선 원인 불명의 사건이 잇따랐다. 지난 6일에는 홍해 남부에 정박 중이던 이란 선박 사비즈호가 선체에 부착된 폭탄으로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BBC는 이와 관련해 “지난 18개월간 이스라엘군이 이란의 석유 등 군수품을 싣고 시리아로 가던 선박 12척을 공격했다”고 보도했다.

○미 정부, 핵합의 복귀할까

이스라엘의 공세가 올 들어 더욱 과격해지고 있는 것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이란 핵합의 복원 움직임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2018년 도널드 트럼프 전 정부가 파기한 핵합의에 다시 발을 내딛는 분위기다. 이스라엘은 핵합의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만큼 바이든 정부의 이 같은 행보가 달갑지 않다.

영국 싱크탱크인 로열유나이티드연구소의 중동 전문가 마이클 스티븐스는 “이스라엘은 이란 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키려 하고 있다”며 “기술적인 면에서는 인상적이지만 위험한 게임”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그림자 전쟁이 앞으로 더욱 격화할지는 미국의 행보에 달려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바이든 정부는 핵합의 복귀 의사를 밝히면서도 선행 조건으로 이란이 지금까지 어긴 핵합의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이란은 미국이 먼저 제재를 단번에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착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핵합의 관련국들은 지난 6일부터 오스트리아 빈에서 협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이란 대표 등이 모여 논의하고 있지만 뚜렷한 합의점은 찾지 못하고 있다.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은 “핵합의를 복원하려면 그동안 이란이 위반한 사안을 어떻게 되돌리느냐를 명시한 새로운 합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