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로 부활 꿈꿨지만…
지분 25% 가진 행동주의 펀드
무리한 배당 요구로 경영진과 갈등
구원투수로 등장했던 CEO는
英 PE와 '인수 밀월' 들통나 사임

인수 무산에 글로벌 PE '군침'
지분 보유한 기옥시아 몸값 뛰어
美·캐나다 펀드 높은 가격 써낼 듯
행동주의 펀드 간섭·CEO의 배신…'난장판' 된 도시바 인수전

도시바가 행동주의 펀드들의 지나친 경영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53년 만에 외부에서 수혈한 구루마다니 노부아키 사장. 그가 지난 14일 갑자기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구루마다니 사장의 ‘백기사’ 역할을 해온 영국계 사모펀드(PEF) 운용사 CVC캐피털이 도시바를 2조3000억엔(약 23조6348억원)에 인수하겠다고 선언한 지 8일 만의 일이다.

구루마다니 사장에 이어 선임된 도시바 신임 경영진은 CVC 인수를 거부하기로 했다. 대신 세계 4대 PE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를 비롯해 미국과 캐나다의 유력 펀드들을 새로운 백기사로 끌어올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도시바를 쥐락펴락해온 행동주의 펀드들도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대규모 분식회계가 위기 원인
146년 전통의 일본 대표기업으로 한때 ‘지배구조 모범생’으로 불리던 도시바가 왜 세계적 펀드들의 먹잇감이 됐을까. 기원은 2015년 도시바의 대규모 회계부정 사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바가 2008~2014년 7년간 2200억엔의 이익을 부풀린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현직 사장 세 명이 한꺼번에 사임했다. 도시바가 2006년 인수한 원자력발전 자회사 웨스팅하우스에서 발생한 대규모 손실은 도시바의 지배구조뿐 아니라 재무구조까지 무너뜨렸다. 웨스팅하우스로부터 7000억엔 이상의 손실을 떠안아 자본잠식에 빠진 도시바는 2017년 12월 6000억엔 규모의 증자를 실시했다. 2년 연속 자본잠식으로 인한 상장폐지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60여 곳에 달하는 해외 행동주의 펀드가 증자에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사모펀드를 끌어들여 상장폐지를 면하는 대신 분란의 씨앗을 심은 셈이 됐다.

행동주의 펀드들은 도시바의 보유자금을 놓고 사사건건 경영진과 맞붙었다. 행동주의 펀드들은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늘리라고 요구했다. 2017년 증자에 참여한 행동주의 펀드가 보유한 지분율은 지금도 25% 이상이다.

도시바는 2018년 4월 승부수를 던졌다. 행동주의 펀드와의 오랜 대립이 회사 경쟁력을 갉아먹는다고 보고 구루마다니 당시 CVC 일본법인 회장을 최고영영자(CEO)로 영입했다. 이후 CVC는 구루마다니 사장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도시바 경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지난 6일 주당 5000엔에 도시바 지분 100%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도시바 내부에서는 구루마다니 사장이 CVC를 통해 장기 집권을 시도한다는 불만이 들끓었다. 2019년 99%에 달했던 구루마다니 사장의 연임 지지율은 작년 7월 주주총회에서 57%로 곤두박질쳤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일본 언론들은 구루마다니 사장이 도시바 내부의 반발로 사실상 해임됐다고 전했다.
미국·영국 펀드가 대안 될까
도시바 신임 경영진은 CVC의 제안을 거부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CVC도 이달 중순 공개매수를 제안하려던 계획을 늦추고 공동 인수자 구성 등을 재점검할 방침이라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 17일 보도했다. 공개매수를 제안받은 도시바 경영진은 찬반 입장을 밝혀야 한다. 합리적인 반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도시바 주주로부터 소송을 당할 우려도 크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도시바가 인수합병(M&A)으로 부흥을 꾀했다가 M&A로 회사 전체를 넘길 위기에 놓였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가운데 파이낸셜타임스 등은 KKR과 미국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 캐나다 인프라 전문 펀드 브룩필드 등이 CVC보다 높은 가격에 인수를 제안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들이 군침을 흘리는 것은 도시바의 반도체 사업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도시바는 메모리 업체인 기옥시아(옛 도시바메모리) 지분 41%를 갖고 있다. 도시바가 보유한 기옥시아의 지분 가치는 최대 1조3000억엔, 도시바 전체의 기업가치는 2조8000억엔으로 평가받는다. 도시바 시가총액(1조7400억엔)보다 1조엔 이상 많다. 인수가격이 높아질수록 경영진이 매각에 반대할 여지는 좁아진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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