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년 전 멕시코 이주한 한인의 후손들, 한인 정체성 간직
한국어·한국문화에 관심 갖는 젊은 후손들 늘어
[특파원 시선] 메리다에 사는 김씨 이씨 박씨…뿌리 기억하는 후손들
"이분이 우리 할아버지입니다.

" "여기 이 꼬마가 어릴 때의 우리 어머니입니다.

"
멕시코 동부 유카탄주 메리다에 있는 한인이민박물관 벽에 가득 걸려있는 옛 흑백 사진들 앞에 서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저마다 사진 하나씩을 가리키며 '가족 자랑'을 시작했다.

스페인어를 쓰고 있었지만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만큼은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하는 이들은 먼 멕시코에서 한국의 뿌리를 기억하며 사는 한인 후손들이다.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이곳 박물관에서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이 마련한 독립유공자 김동순 선생 후손 건국포장 전수식에 함께 자리한 한인 후손들에게서 한국의 피를 알아채기는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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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2세를 제외하고는 겉보기엔 영락없이 멕시코인이고, 대부분 한국말도 하지 못했다.

한복을 곱게 입었거나, '안녕하세요'라고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한인 후손이냐?"고 물으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조상이 처음 멕시코에 발을 디딘 건 116년 전인 1905년이다.

멕시코 메리다 일대 에네켄(선박용 밧줄을 만드는 선인장의 일종) 농장의 노동자 모집 광고를 보고 배에 오른 1천33명이 멕시코 한인 1세대다.

"북미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고 "수토(水土)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한 데다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라는 광고를 보고 새 삶을 꿈꿨지만 현실은 달랐다.

뜨겁고 건조한 농장에서의 노동은 몹시 고됐고 임금은 턱없이 적었다.

4년의 계약 기간이 끝났을 땐 약속한 '큰 이득'은 고사하고 한국행 여비조차 빠듯했다.

더구나 조국은 사실상 국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결국 1세대 한인 모두 멕시코에 남았고 일부는 이후 쿠바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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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에네켄'으로 불리는 멕시코 한인들은 한동안 기억 속에서 멀어졌다.

물리적으로 먼 데다 노동 이민이 한 차례에 그치다 보니 한국과 멕시코 한인과의 연결고리도 약해졌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차례로 겪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에도 바빴던 고국은 멀리 멕시코의 동포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동안에도 멕시코 1세대 한인들은 한국의 뿌리를 기억하려 애썼다.

한인회를 조직하고 학교를 세우고, 빠듯한 임금을 쪼개 독립자금으로 송금했다.

독립된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한인들은 멕시코 땅에서 눈을 감았고, 세대가 지날수록 한국의 피는 옅어졌다.

1세대 한인의 성비 불균형 탓에 현지 여성과 결혼한 이들이 많았다.

대부분 노동자 계급이던 2세대 후손들에겐 부모의 모국어를 배우는 일보다 현지에 섞여 먹고사는 일이 급선무였다.

후손들에게 남은 뚜렷한 한국의 흔적은 현지 이름 뒤에 붙은 김·이·박 같은 성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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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한국 성마저 잃은 이들도 많다.

한인 3세인 에밀리오 코로나의 원래 성은 '고'였다.

멕시코로 건너온 조부 고희민 씨가 '높을 고(高)'를 설명하기 위해 머리 위로 손을 쳐든 것을 현지 관리가 '왕관'을 뜻하는 '코로나'로 오해한 듯하다는 것이 그의 짐작이다.

이대로라면 멕시코에서 한국의 뿌리는 점차 흐려져 사라질 일만 남았겠지만, 다행히도 그렇지 않았다.

세상이 좋아지고 한국과 멕시코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더 많이 서로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영화 '애니깽', 2000년대 김영하 소설 '검은 꽃'이 멕시코 한인들을 소환했다.

우리 정부도 뒤늦게나마 멕시코와 쿠바의 독립유공자를 찾아 기리고, 그들의 후손을 초청해 한국을 알렸다.

가장 많은 한인 후손들이 사는 메리다엔 '한·멕 우정병원'이 들어서고, '대한민국로'가 생기고, '한국의 날'이 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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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한인 후손 중에 얼굴도 본 적 없는 선조의 모국과 그 나라의 언어, 문화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늘어났다.

멕시코에도 널리 퍼진 한류 덕분에 자신의 이국적인 성을 자랑스러워하는 이들도 생겼다.

메리다에 사는 한인 4세 예스비 리(40)는 아이의 이름을 '하늘'로 지었다.

독립유공자 김동순 선생의 증손녀 켈리 알론소 김(21)은 부모, 조부모도 몰랐던 한국어를 공부한다.

역시 4세인 마리아 에우헤니아 올센 아길라르는 '무궁화예술단'을 만들어 한국의 춤을 춘다.

이들은 모두 한인 후손임이 자랑스럽고, 한국과 멕시코를 잇는 다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메리다를 포함해 멕시코 전체엔 3만 명가량의 한인 후손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멕시코 사회 각 분야에서 자리잡은 후손들은 모태 친한파나 마찬가지다.

한인 후손임을 모르고 사는 이들도 있고, 멕시코 한인 이민사엔 여전히 빈 곳도 많다.

공백을 메우는 건 한국과 멕시코가 함께 해야 할 일이다.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한국이 이 후손들을 잊지 않는 한, 그 옛날 먼 조국을 그리워하고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에네켄 한인들도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이들이 기억하는 한 망자도 소멸하지 않는다는, 멕시코 배경의 디즈니 영화 '코코' 속 메시지처럼 말이다.

[특파원 시선] 메리다에 사는 김씨 이씨 박씨…뿌리 기억하는 후손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