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나라. 17세기 스페인풍 건물이 줄지어 선 거리를 1950년대 올드카가 질주하는 공산국가. 이런 쿠바가 변하고 있다. 미국의 강력한 제재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등으로 국가 경제가 큰 타격을 입자 서서히 ‘자본주의’에 문을 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국 아니면 죽음”이라던 쿠바 공산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1926∼2016)의 구호도 이젠 “조국 그리고 삶”(Patria y vida)으로 바뀌었다. 이는 쿠바에서 최근 주목받는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다양한 쿠바 출신 뮤지션들이 협업해 내놓은 이 노래는 쿠바 국민들이 겪는 경제적 고통을 꼬집고 있다.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62년간 공산정권을 지켜온 쿠바도 어쩔 수 없었을까. 최근 쿠바 정부는 민간의 산업 진출 범위를 크게 확대하면서 국가 주도 경제를 탈바꿈시키기 시작했다.

민간 활동 대폭 확대

'경제난'에 지친 쿠바, 자본주의에 문 열다
쿠바 정부는 지난 10일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인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부분 산업에 민간기업의 활동을 허용하기로 했다. 마르타 엘레나 페이토 쿠바 노동부 장관은 “민간기업 활동을 허용하는 업종을 기존 127개에서 2000개 이상으로 대폭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국영기업이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 관여하는 업종은 교육, 의료, 언론, 사법, 안보 등 124개만 남았다.

뉴욕타임스는 “이제는 쿠바 일반 국민도 치즈·페인트·장난감 공장을 설립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아직까지는 대형 기업 형태가 아니라 소규모 자영업 수준으로 허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공산국가 쿠바는 옛 소련 해체 후 1990년대부터 조금씩 민간에 산업을 개방해왔다. 그러나 그 규모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쿠바 정부에 따르면 현재 쿠바 전체 노동자의 13%인 60만 명가량이 민간 부문에 종사하고 있다. 상당수가 호텔, 식당, 택시 등 관광업 관련 근로자다. 세계은행 등에 따르면 쿠바 근로자의 65.9%가 서비스업에서 일하고 있다. 서비스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70%에 이른다.

산업 부문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16.8% 수준에 그친다. 쿠바 정부는 민간에 산업을 개방하면 위축된 경기가 살아나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다. 쿠바 경제학자 리카르도 토레스는 “(이번 조치는) 매우 중요한 진전”이라며 “쿠바 경제 회복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쿠바 정부의 민간 경제 활성화는 새롭게 출범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존 카불리치 미국·쿠바 통상경제위원장은 “쿠바가 민간 경제 확대를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미국에서도 이를 적극 지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금수 조치 등으로 경제난

쿠바는 그동안 미국의 금수 조치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미국은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쿠바와 국교를 단절하고 1962년부터 금수 조치를 단행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당시 해빙 분위기가 일부 조성되기도 했지만 이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변화를 모두 되돌리고 새로운 제재까지 추가했다.

쿠바 정부는 2019년 4월부터 2020년 3월까지 1년간 미국의 금수 조치로 인한 피해액이 55억7000만달러(약 6조2000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한 해 전보다 12억달러 이상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 10월 미국 국무부는 쿠바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강화하기 위해 쿠바행 전세기 운항을 전면 금지했다. 미국의 제재에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치며 지난해 쿠바 관광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작년 쿠바 경제는 11% 역성장하고, 수출은 40%가량 급감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중 통화 제도도 폐기

쿠바는 민간 경제 활성화 정책과 더불어 새해부터 복잡한 이중 통화 제도를 폐지했다. 1994년 이후 쿠바에선 일반 ‘쿠바페소(CUP)’와 외국인들이 주로 쓰는 ‘태환페소(CUC)’가 공존했다. CUC는 정부가 외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한 것으로 ‘1달러=1CUC’로 고정됐다. 쿠바 내에서 일반적으로 ‘1CUC=24∼25CUP’의 비율로 교환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가 국영 수입업체 등에는 ‘1CUC=1CUP’의 환율을 적용해주는 등 서로 다른 환율이 존재했다.

독특하고 복잡한 이중 통화 제도로 여러 부작용이 발생하고, 외국 기업의 투자도 어려워지자 쿠바 정부는 올해부터 CUC를 폐지하고 CUP로 단일화하기로 했다. 24CUP는 1달러의 가치를 지닌다. 쿠바 정부는 CUC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6개월의 유예 기간을 두기로 했다.

쿠바에서 단일 통화제가 자리잡으면 쿠바 경제에 투명성이 더해지고 외국인 투자도 유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물가 상승 등 상당한 혼란이 불가피하다. 사실상 달러 대비 쿠바페소의 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지고, 수입업체들이 받던 ‘1달러=1페소’의 우대 환율이 사라져 상품 가격이 크게 오를 수밖에 없어서다.

쿠바 경제를 연구해온 카멜로 메사 라르고 미국 피츠버그대 명예교수는 “(이중 통화 폐지는) 즉시 인플레이션을 촉발하고 구매력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려했던 물가 상승은 곧바로 나타났다. 전기와 교통요금 등이 줄줄이 올랐다. AFP통신에 따르면 쿠바 당국은 올해 160%의 물가 상승률을 예상하고 있다. 충격을 덜기 위해 쿠바 정부는 새해부터 최저임금을 월 400페소(약 1만7000원)에서 2100페소로 인상했다. 연금과 다른 보조금 등도 올렸다. 그러나 5배 넘는 임금 인상으로도 오른 물가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쿠바 경제학자 페드로 몬레알은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쿠바 경제의 탈중앙화와 함께 사회적 안전망이 갖춰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쿠바가 오랜 기다림 끝에 개방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 자본주의 체제로 완전히 바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 “앞으로 노동시장 개혁은 경제 위기에 대한 사회적 불만을 막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