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백신 챔피언' 이스라엘이 허무는 공정배분의 원칙
"전 세계 모든 정부는 코로나19 백신이 보건 종사자와 엄청난 코로나19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배분되는 것을 보장한다.

"
인류가 맞이한 재앙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지혜롭게 극복하자며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달 내놓은 백신의 공평 분배 촉구 선언문의 일부다.

선언문이 정의한 각국 정부의 코로나19 백신 배분 원칙은 방역 최전선의 보건 종사자와 코로나19에 감염될 경우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 있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백신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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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접종을 진행하고 일상 복귀에 시동을 건 이스라엘에서는 최근 이런 원칙을 깨는 백신의 쓰임이 연일 논란이 되고 있다.

우선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댄 분쟁 상대 시리아와 수감자 교환을 위해 백신을 사용했다는 의혹을 샀다.

국경을 넘었다가 체포된 여성과 자국에 억류된 시리아인을 맞교환하기 위해 중재자인 러시아에 돈을 주고 백신을 대신 구매해 몸값으로 시리아에 보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정부는 부인했지만, 의혹은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수감자 석방 조건에 관한 '비공개 명령'(gag order)을 내렸다가 풀었지만, 러시아와 맺은 비밀 합의를 이유로 백신 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해 의구심을 키웠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스라엘은 백신을 본연의 목적이 아닌 수감자 구출을 위한 몸값으로 사용한 셈이 된다.

자국민 접종에 쓰고도 남을 만한 물량을 보유한 이스라엘은 백신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지난 23일 성명을 통해 여러 국가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용하지 않는 백신을 나눠주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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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백신 접종의 모범인 이스라엘이 아직 백신을 구하지 못한 국가에 베푸는 자비로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현지 언론을 통해 파악된 이스라엘의 백신 제공 대상국 대부분이 종교 분쟁지인 예루살렘에 대사관을 개설했거나 개설 의향을 내비친 국가, 또는 한때 단절했던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복원한 국가들이다.

예루살렘은 유대교도뿐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성지로 여기는 곳이다.

그래서 '분쟁의 성지'로도 불린다.

친이스라엘 정책을 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이곳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대사관도 옮겼다.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인 팔레스타인은 물론 아랍권 전체가 미국의 대사관 이전에 분노했다.

이스라엘은 그런 예루살렘에 대사관을 유치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백신을 필요로하는 이웃들을 줄 세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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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공평한 백신 분배 원칙에 충실하다면 정치적 이슈에 연관된 '먼 이웃'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심각한 위기를 맞은 팔레스타인을 우선해서 챙겼어야 한다는 게 비판론자들의 시각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애써 못 본 척해왔고 국제사회의 강력한 비판을 받자 몇천 회분의 물량으로 국제여론의 뭇매를 피하려 했다.

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무장 정파 하마스 통치하의 가자지구에 제공한 백신의 이동을 지연시키면서 인질 석방 문제를 연계하려 했다.

백신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날 선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특파원 시선] '백신 챔피언' 이스라엘이 허무는 공정배분의 원칙
버니 샌더스 미 상원의원은 트위터에 "점령 세력으로서 이스라엘은 자신이 통제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져야 한다.

점령지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애타게 (백신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네타냐후가 남는 백신을 외국에 주겠다는 것은 충격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스라엘은 백신 보급 불균형 상황에서는 언제든 백신이 정치적 외교적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인류가 25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코로나19를 하루라도 빨리 극복하려면 빠른 백신공급이 절실하다.

그리고 특정 국가 또는 특정 세력이 백신을 정치·외교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통제 수단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