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포트

통관 늦어져 해산물 폐기하고
화물배송 운임 급등

통관 서류만 400쪽 넘어
수산물 EU 수출 크게 줄어
수산업자, 정부청사서 시위
영국 수산물 수출업자들은 지난 18일 런던 정부청사 앞에 화물트럭을 주차하고 브렉시트 여파로 유럽연합(EU) 수출에 차질이 생겼다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트럭에는 ‘브렉시트 대학살’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AP연합뉴스

영국 수산물 수출업자들은 지난 18일 런던 정부청사 앞에 화물트럭을 주차하고 브렉시트 여파로 유럽연합(EU) 수출에 차질이 생겼다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트럭에는 ‘브렉시트 대학살’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8일 영국 런던 다우닝가의 정부청사 인근. 수산물 수출업자 수십 명이 트럭에 해산물을 가득 싣고 집결했다. 이들이 몰고 온 트럭에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대학살’ ‘무능한 정부가 수산업을 망치고 있다’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브렉시트 이후 통관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생계에 위협이 될 정도로 수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항의 시위에 나선 것이다. 시위대 일부는 “보리스 존슨 총리 관저 앞에 해산물을 쏟아부어 버리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영국 산업계가 지난 1일 단행된 브렉시트 여파로 혼돈에 휩싸였다. 복잡해진 통관 절차에 수출이 지연되고, 운임이 치솟으면서 수출이 급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수개월간 시달려온 무역업계 종사자들이 설상가상으로 치명타를 입었다는 분석이다.
유령도시로 변한 어시장
브렉시트 3주…삐걱거리는 영국 경제

영국 수산업자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핵심 사항은 복잡한 통관 및 검역 절차다. 브렉시트 이전과 달리 이들은 관세 신고와 원산지 보증, 보건 관련 증명서 등의 각종 서류를 완벽하게 갖춰야 유럽연합(EU) 국가에 수출할 수 있다. 여러 상품이 한 트럭에 실린 경우 한 상품에 대한 서류 문제만 발견돼도 수출이 중단될 수 있다. 한 해산물 수출업자는 “지난주 유럽에 입국하기 위해 400쪽이 넘는 서류를 구비해야 했다”고 하소연했다.

영국 수산업자들은 가리비와 굴, 홍합, 랍스터, 게 등을 EU에 수출하고 있다. 신선함을 유지해야 하는 수산물 특성상 수출이 지연되면서 유럽 구매자들이 받기를 거부해 아예 폐기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대형 화물트럭 한 대당 수만파운드의 손실이 발생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데이비드 로지 DR콜린&선 대표는 “15만파운드 규모의 랍스터, 새우 등이 실린 트럭을 매일 프랑스로 한두 대씩 보내곤 했는데 통관 문제로 올해엔 한 대도 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런 탓에 영국의 EU 수출 수산물은 급감하고 있다. 영국 내 가장 큰 항구인 피터헤드항에서 이달 들어 EU 수출용으로 접수된 수산물 규모가 하루평균 4280박스로 지난달(5225박스)보다 18% 줄었다. 한 박스엔 통산 30~45㎏의 수산물이 담긴다. 제임스 위더스 스코틀랜드푸드&드링크 최고경영자(CEO)는 “유럽 대표 어시장인 피터헤드가 유령도시처럼 변했다”며 “보트는 발이 묶였고 수출업자는 순식간에 일거리를 잃었다”고 전했다.

무역 차질을 빚는 곳은 수산업계만이 아니다. 영국 경제의 10%를 차지하는 제조업계도 부품 공급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영국산업연맹(CBI)에 따르면 제조업체들의 경기 기대감을 보여주는 ‘신규주문지수’가 지난해 12월 -25에서 이달 -38로 뚝 떨어졌다. 신규주문지수는 기업 업황의 선행지표로 0 아래로 떨어지면 수주량 감소를 예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인 뉴턴스미스 CBI 수석경제학자는 “영국 제조업체들은 계속 브렉시트 역풍을 맞고 있다”며 “코로나19 사태에 새로운 무역장벽까지 겹치면서 올초 영국 경제가 위축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최근 로이터통신은 영국 중소기업 다섯 곳 중 한 곳은 새롭게 시행된 통관작업 탓에 EU로의 수출을 일시 중단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보도했다. 영국 회계법인 UHY해커영의 미셸 데일 수석매니저는 “이런 추가 비용과 서류 작업은 유럽과 거래하는 영국 중소기업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며 “EU 기업들은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영국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비관세 장벽으로 수입품 가격 급등
존슨 총리는 EU 수출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에 2300만파운드 규모의 펀드를 통해 보상하겠다고 발표했다. 다만 복잡한 통관 절차 문제와 관련해서는 “브렉시트 초기에 발생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면서 불가피하게 겪는 일시적인 불편함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우려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테레스 래피얼 블룸버그통신 칼럼니스트는 “존슨 총리의 설명대로 행정적인 절차는 시간이 지나면 안정화될 수 있다”면서도 “정말 중요한 문제는 수입품의 가격 상승 가능성”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12월 영국과 EU는 무관세 등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하지만 추가적인 무역 행정 비용, 운임 인상 등 ‘비관세 장벽’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결국 수입품 가격이 올라 영국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우려다.

특히 화물 비용이 치솟고 있다. 독일 유통정보 제공업체인 트랜스포레온에 따르면 지난주 EU에서 영국으로 가는 화물 배송 운임은 지난해 3분기보다 47% 급등했다. 영국에 화물을 싣고 들어갔다가 나올 땐 짐칸을 비운 채 돌아와야 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영국 당국은 새로운 EU와의 무역 거래 비용이 연간 70억파운드가량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유럽 공연 어려워진 영국 음악인들
브렉시트 파장은 영국 경제 전반으로 확산 중이다. 금융 중심지라는 영국의 위상이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대표적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사설을 통해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유럽에 금융시장을 장악할 절호의 기회를 주게 됐다”고 지적했다.

영국과 EU는 오는 3월을 목표로 금융 서비스 규제에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벌이고 있다. 이 기간 영국에 본사를 둔 기업은 EU 고객을 대상으로 신용평가, 주식 및 파생상품 거래 등 대부분 금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 이미 런던에 본사를 둔 기업들의 주식 거래 대부분이 프랑스 파리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거래소로 장소를 옮겨 이뤄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새해 첫 거래일이던 지난 4일 런던에서 거래된 EU 주식 가운데 약 60억유로어치가 EU 시장으로 빠져나갔다.

영국 음악인 100여 명은 “브렉시트로 유럽 공연이 어려워졌다”며 음악인 무비자 여행이 가능하도록 유럽 국가들과 협상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서한 작성자에는 팝 가수 에드 시런, 엘튼 존, 스팅, 록그룹 라디오헤드, 핑크 플로이드 출신의 가수 로저 워터스, 베를린필 수석지휘자를 지낸 사이먼 래틀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이제 유럽 순회공연을 하려면 산더미 같은 서류와 비싼 비자 비용이 필요하다”며 “이런 추가 비용 때문에 많은 순회공연이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