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원 통과한 부양법에 거부권 시사
"파키스탄 성평등 정책에도 지원금"
"중국이 문제이지 미국인 잘못 아니다"

'정치적 고립 탈피 위한 승부수' 관측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미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부양책을 내놓은 건 총 다섯 차례입니다. 이번 상·하원 표결을 통과한 8920억달러짜리를 포함해서죠.

1차는 83억달러, 2차는 1000억달러, 3차는 2조2000억달러, 4차는 4840억달러였습니다. 누계 기준으로 3조7000억달러에 달합니다. 미국의 작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18%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마지막 부양책 합의가 특히 어려웠습니다. 지난 7월부터 거의 6개월 간 공방이 오갔지요. “더 주자”는 민주당과, “국가 재정을 생각하자”는 공화당이 치열하게 맞붙었기 때문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캠페인 초기엔 공화당과 생각이 일치했으나 점차 “더 많이 주자”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일단 받고 보자”는 대중 심리를 읽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선 민주당보다도 공격적으로 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았지요.

양당 지도부가 부양책에 최종 합의한 건 지난 20일(현지시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하원과 상원이 차례로 열려 일사천리로 투표가 진행됐지요. 결과적으로 하원에서 359대 53표, 상원에선 91대 7표로 가결됐습니다. 법안이 압도적 지지를 얻은 얻은 겁니다.

그런데 부양책 시행에 뜻하지 않은 제동이 걸리게 됐습니다. 트럼프가 “대폭 수정이 필요하다”며 거부권 행사를 강력히 시사했기 때문이지요.

트럼프는 22일 트위터에 올린 영상 메시지에서 “의회를 통과한 코로나 부양법은 정말로 수치(disgrace)”라며 “제대로 된 법안을 만들어 다시 보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영상 메시지를 띄워 "이번 부양법은 미국인의 수치"라고 발언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영상 메시지를 띄워 "이번 부양법은 미국인의 수치"라고 발언하고 있다. 트위터 캡처

그는 “5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법안을 제대로 읽어본 의원이 없을 것”이라며 “과거 내가 촉구했던 부양책 내용과 완전히 다르다”고 했습니다. 또 이 법안이 “로비스트들을 위한 것”이라며, 반대 이유를 아래와 같이 구구절절 설명했습니다.

- 코로나와 관련이 없는 캄보디아, 미얀마(버마), 이집트, 파키스탄, 온두라스, 과테말라 등의 개별 정책을 지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해외 환경이나 성평등 프로그램에도 원조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 이집트 정부 및 군대를 지원하는 방안이 포함됐는데, 이집트는 이 돈으로 러시아 무기만 구입할 것이다.

- 아직 열지도 않은 케네디 센터, 스미소니언 박물관 등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등 낭비 요소가 너무 많다.

- FBI(연방수사국) 건물을 신축하는 예산도 이번 코로나 부양책에 들어갔다.

- 가금류 생산 기술을 증대시키는 예산이 이번 부양 법안에 포함돼 있다.

- 미국 납세자에게 지급하는 현금이 너무 적다. 현행 1인당 600달러에서 최소 2000달러로 올려야 한다. 부부 기준이라면 4000달러는 돼야 한다.

- 소기업과 자영업자, 특히 식당 경영자에 대한 혜택을 늘려야 한다. 식당 오너들이 받는 혜택은 2년 간의 세금 감면이 고작이다. 코로나 사태에서 진짜 잘못한 쪽은 중국이지 미국인들이 아니다.


트럼프의 거부권 시사 이유가 합당해 보이는 측면이 있지만 미국 내 여론은 좋지 않습니다. 한시가 급한 마당에 또 다시 지리한 공방으로 시간을 끌 수 없다는 것이죠.

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시간만 끌뿐, 상·하원이 재표결을 통해 힘으로 법을 시행할 수 있지요. 더구나 이번 부양책 협상 때 현금 지급액을 줄이자고 주장한 쪽은 트럼프가 속한 공화당이었습니다.

민주당 1인자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즉각 트럼프의 말을 되받아 쳤습니다. “원래 우리가 밀어 부쳤던 대로 미국인 1인당 2000달러씩 지급하는 방안을 추진하자”는 겁니다. 아예 “이번주에 하자(Let's push for 2000 dollars this week)”고 운을 뗐지요.

국가 재정 적자를 걱정하는 공화당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자칫 공방만 오갈 수 있습니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오른쪽)이 지난 20일 워싱턴 의회의 기자회견장에서 경기 부양책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오른쪽)이 지난 20일 워싱턴 의회의 기자회견장에서 경기 부양책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트럼프는 왜 실현 가능성이 낮은 ‘부양책 거부권 행사’ 카드를 꺼내 들었을까요.

대선 불복 선언과 연관 짓는 해석이 적지 않습니다. 미국에선 차기 대통령이 조 바이든이란 사실에 대해 의심을 품는 사람이 점차 줄고 있지요. 트럼프가 매일 여러 개의 ‘대선 불복’ 트윗을 띄우지만 이를 보도하는 곳조차 거의 없습니다. 바이든만 일거수 일투족 보도되고 있지요. 판세가 완전히 기울면서, 트럼프는 공화당 내에서도 고립되는 분위기입니다.

트럼프는 실제 이번 영상 메시지의 마지막에 “의회가 서둘러 새로운 부양 법안을 내게 보내주면 이걸 차기 행정부에 전달해 잘 시행하도록 하겠다. 차기 행정부엔 내가 있을 것.”이라고 마무리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내년 1월 20일까지의 남은 트럼프 임기 동안 미국 내 정국 불안이 커질 것이란 관측이 많습니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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