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에 넘어간 전기자동차 배터리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일본 정부와 기업이 팔을 걷어붙였다. 일본 정부는 차세대 전기자동차 배터리로 주목받는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수천억엔(수조원)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도요타는 내년 세계 최초로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를 공개할 계획이다.

10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2조엔 규모로 편성하는 탈석탄화 기술지원기금 가운데 수천억엔을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배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의 전고체 배터리 개발 및 양산을 지원하는 보조금으로 쓰일 전망이다. 전고체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리튬을 조달하는데도 민관 협력체계를 구축할 방침이다. 리튬 매장량은 볼리비아 등 전세계 일부 지역에 편중돼 있다.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 전고체 배터리 개발을 독려하려는 것은 현 상태대로라면 전기차 핵심부품의 상당 부분을 한국과 중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위기감 때문으로 분석된다.

소니 등 일본 기업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리튬이온 배터리를 실용화하고도 2000년대 들어 시장 주도권을 한국과 중국에 넘겨주고 있다. 에너지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 1∼9월 전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60%를 한국과 중국 기업이 점유하고 있다. 1위는 중국 CATL(점유율 23.1%)이었고, LG화학(22.9%)과 삼성SDI(6.2%), SK이노베이션(5.5%) 등 한국 업체가 2,4,5위를 차지했다. 일본 기업 가운데는 파나소닉이 3위(21.2%)로 유일하게 5위 이내에 들었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핵심소재인 절연제 시장에서도 일본 아사히카세이가 지난해 중국 상해에너지에게 세계 1위 자리를 내줬다.

2050년까지 탈석탄사회로 이행하겠다고 선언한 일본은 2035년께 순수 화석연료차의 판매를 전면 중단할 계획이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전기차의 개발과 보급은 목표 달성의 중요한 과제로 지적된다. 리튬이온 배터리 시장이 한국과 중국에 넘어간 만큼 전고체 배터리 시장을 선점해 차세대 전기차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겠다는게 일본 정부의 전략으로 풀이된다. 전고체 배터리는 전지 내부 양극과 음극 사이에 있는 전해질을 액체가 아닌 고체로 바꾼 전지다. 리튬이온보다 충전시간은 짧고 주행거리는 길어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로 주목받고 있다.

일본 민간기업들도 전고체 배터리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도요타는 내년 세계 최초로 전고체 배터리를 장착한 시험차량을 공개할 계획이다. 시험차량의 성능시험을 본격화해 2020년대 초반 시판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도요타의 전고체 배터리 전기차는 10분 충전으로 500km를 달릴 수 있다. 동일한 크기의 리튬이온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보다 주행거리가 2배 이상 길다. 도요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1천건 이상의 전고체 배터리 관련 특허를 갖고 있다. 닛산도 2028년 자체 개발한 전고체 배터리를 실은 자동차를 내놓을 계획이다.

일본 완성차 업체들의 움직임에 맞춰 일본 소재업체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지고 있다. 미쓰이금속은 내년부터 전고체 배터리의 핵심소재인 고체 전해질 소재를 연간 수십t 규모로 생산하기로 했다. 먼저 완성차 업체들의 시험제작차량 수요에 대응하고 생산양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전세계적으로도 전고체 배터리 개발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투자한 미국 배터리 업체 퀀텀스케이프는 전날 15분 만에 80%를 충전할 수 있고 한번에 300마일(약 483km)을 주행할 수 있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독일 BMW는 미국의 연료전지기업 솔리드파워와 손잡고 전고체 배터리 전기차를 2025∼2026년께 출시할 계획이다. 폭스바겐도 미국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과 합작회사를 설립해 2025년 생산라인을 완공할 계획이다. 중국 하이테크기업인 칭타오에너지는 내년부터 3년간 전고체 배터리 연구·개발(R&D)에 10억위안(약 1663억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CATL, 파나소닉 등도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